앞에서는 '힐링', 뒤로는 '갑(甲)질'?

머니투데이 박창욱 기자 2013.06.21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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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멘토다]33. 스웨덴 영화 '퓨어'‥기성세대의 위선과 가식 비판

# 지난해 이 맘 때였다. 방한한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재단의 대표와 음악감독 두 사람을 인터뷰해 기사로 소개한 적이 있었다. 호세 아브레우 박사가 창립한 이 재단은 베네수엘라의 무상 음악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를 담당하는 단체다.

인터뷰 기사에선 "엘 시스테마는 인간을 개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라는 내용과 함께 "정신 세계의 먹을 거리를 만들기 위해, 또 정신세계의 인프라를 만들기 위해 예술교육의 대상을 넓혀가야 한다"는 이들의 목소리를 실었다.



엘 시스테마는 구스타보 두다멜 LA필하모닉 상임 지휘자를 비롯한 세계적 음악가를 다수 배출했다. 또, 베네수엘라 의대생의 3분2 이상이 이 프로그램 출신일 정도로 교육 효과를 인정받았다. 특히 빈민가 아이들이 음악교육을 통해 범죄의 유혹에서 벗어나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해줬다는 세계적 호평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 기사가 나가자, 어느 독자가 이메일을 보냈다. 욕설이 섞인 이메일의 요지는 '우리나라 예술가들의 수준이 더 높다. 어디서 베네수엘라 같은 후진국 이야기를 쓰느냐'는 비난이었다.



물론 일부의 견해이겠으나 경제력의 잣대만으로 예술적 가치와 수준을 평가하는 인식이 개탄스러웠다. 우리 사회의 예술 교육에서 입시비리 사건이 끊이지 않는 데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도 스쳤다.

#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저서 '구별짓기'에서 문화적 자본이 계층별로 불평등하게 분배되고 차별적으로 소비되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모습을 비판했다. 그는 또 산업사회에서 문화적 취향이 어떻게 계급을 규정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과거엔 혈통이 신분을 결정했다면, 지금은 사회적 지위와 교육에 따른 문화적 취향과 소비성향이 신분을 구분한다.

앞에서는 '힐링', 뒤로는 '갑(甲)질'?


지난 20일 개봉한 '퓨어'(감독 리자 랑세트)는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문화적 계급이 사회적 장벽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다룬 스웨덴 영화다.


기성 세대의 허위와 가식에 대한 유럽판 '88만원 세대'의 반란을 그리고 있다. 영화엔 통속적인 스토리가 주는 재미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음악이 좋고 완성도도 뛰어나다.

꿈도 배운 것도 없이 하루 하루를 살아가던 주인공 카타리나(알리시아 비칸데르)는 어느날 유투브에서 우연히 들은 모짜르트의 음악에 반해 콘서트홀의 인턴 안내원으로 취직한다. 그녀의 예술적인 감성을 예쁘게 본 콘서트홀의 실장은 그녀를 예술교육 프로그램 담당 정식 직원으로 추천하려고 한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아담(사뮤엘 프뢸러)이 그녀의 앞 길을 가로 막고 나선다. 처음엔 '용기만이 살 길이다'라며 그녀를 위로하면서 유혹해 육체관계까지 맺지만, '인생의 쉼표'(?)라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 다음엔 냉혹해진다.

아담은 매달리는 카타리나를 냉정하게 해고해 버리고, 그녀를 끝까지 조롱한다. 이른바 '힐링' 해주는 척 하면서 실제론 '갑(甲)질'을 한 것이다. 영화는 이 대목에서 기성 시대의 가식과 위선 그리고 '갑질'을 응징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기존의 '신데렐라' 스토리를 비틀어 댄다.

# 박근혜 대통령은 '문화 융성'을 국정기조 중 하나로 삼았다. 이 문화 융성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우선 경제력으로 예술적 감성이 결정되는 사회구조부터 바꿔가야 한다. 순수한 예술적 감성은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않아도 충분히 뛰어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현실의 벽은 결코 그렇지 않다. 예술 교육을 제대로 받기 위해선,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면 예술적 인정을 받는 학벌을 얻기 위해선 '억' 대의 사교육비가 드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문화가 융성하려면 이런 구조부터 없어져야 한다. 재능만 있다면 누구나 예술의 꿈을 펼쳐볼 기회를 얻을 수 있는 나라가 진정한 문화대국이 아닐까 싶다. '개천에서 용 나는' 문제 뿐 아니라 문화 융성도 결국 교육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족. 이번 주 이 코너에 소개할 영화로 애초 '월드워Z'를 써볼까도 했다. 하지만 원작 소설을 비틀어 미국적 가치의 우월성을 설파하는 별 특별할 것 없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소개해서 뭐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까지 굳이 소개를 안 해도 마케팅은 강력할 테고, 섹시하면서도 자상한 캐릭터의 주인공 브래드 피트를 보러 가는 여성 관객들은 충분히 많을 테니. 현란한 비주얼을 즐기다보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맨 오브 스틸' 같은 할리우드 영화가 가뜩이나 요즘 스크린에 판을 치고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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