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영화의 걸작으로 꼽히는 1982년작 '블레이드 러너'에서 전투용 복제인간 '로이'가 정해진 4년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몸부림치다 빗속에서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세상에 나온 지 30년이 넘은, 본 지 20년도 훨씬 더 된 이 걸작이 최근 기억 속에서 다시 되살아났다. 오는 5일 개봉하는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감독 장철수)의 시사회 상영을 보고 난 직후였다. 완성도나 장르의 차이를 떠나 이 두 영화에는 비슷한 주제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재미난 웹툰의 스토리를 이미 수 백만명의 독자가 안다. 스포일러가 대중에게 노출된 셈인데, 영화는 새로운 극적 장치 없이 웹툰의 내용을 실사로 충실하게 옮기는 데 머무른다.
대신 이 영화가 선택한 전략은 배우를 통한 캐릭터의 매력이다. '대세 배우' 김수현이 주연이라고 하니 한 후배 여기자는 "꺅~"하고 소리부터 내지른다. 김수현은 동네바보 '동구'로 위장한 '원류환' 캐릭터를 잘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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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특수부대원 출신의 남파 간첩으로 가수 지망생과 고교생으로 위장한 '리해랑'과 '리해진' 역을 맡은 박기웅과 이현우의 연기도 괜찮다. '싱크로율 200%'라는 영화홍보 문구가 괜한 과장은 아니다.
특히 북한특수부대 교관 '김태원' 대좌역을 맡은 손현주와 남파 고정간첩으로 김일성대학 교수 서상구 역을 한 고창석 등 베테랑 조연들은 만화적 스토리 설정으로 인해 자칫 가볍게 흘러 버릴 수도 있는 이 영화의 드라마적 분위기를 잘 잡아준다.
이미 웹툰을 본 사람들은 실사 캐릭터를 보는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웹툰을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영화 자체만으로 꽤 재미있다. 최근 강세를 보이는 할리우드 오락물에 대한 한국 영화의 대항마로 나설 만하다.
/북한 특수부대 출신 남파간첩 역할을 한 이현우와 김수현(오른쪽). 출처 영화 홈페이지.
북한 고위 장성인 아버지에게 버려진 첩의 자식 리해랑은 '삶의 재미'와 원류환과 경쟁에서 다져진 '우정'이다. 또 다른 특수요원 리해진은 '스승'이다. 리해진은 원류환에게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특수부대 훈련에서 생존의 에너지를 얻었다. 그래서 그를 생의 멘토로 여긴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그들만의 추억으로 서로 묶여 있다.
반면, 영화 속 김태원에겐 '조국' 즉 국가다. 국가의 명령이라면 제자들조차도 모두 자기 손으로 서슴없이 처단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는 과업을 이행한 기억만 있을 뿐 추억이란 건 없다. 명령과 복종만 있을 뿐 어떤 인간관계도 없다.
/ 북한특수부대 교관 역할을 한 손현주. 사진=영화 홈페이지
동구를 거두는 슈퍼 아주머니를 봐도 알 수 있다. 아주머니는 동구와 깊어진 정을 동구의 월급통장 명세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동구 월급'은 '우리동구 월급'으로, 다시 '우리 둘째아들'과 '작은아들 장가밑천'으로 바뀌고, 그 명칭이 하나씩 바뀔 때마다 금액은 점점 늘어난다.
# 흔히들 국가와 조직에 충성하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공동체가 아니라 권력자나 우두머리 개인에게 충성하라는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영화 속에서도 북한군 고위간부인 리무혁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신이 키운 특수부대원들을 반역으로 몰아 처단하고자 한다.
이처럼 국가나 조직을 들먹이는 자들 중에는 사실 제 잇속만을 차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단언 컨데 북한처럼 개인을 희생시키는, 개인을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로 삼는 국가와 조직은 진정한 의미의 국가와 조직이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 국가와 조직을 들먹이는 자들은 카를 포퍼의 말마따나 '열린 사회의 적'일 뿐이다. '국가와 조직'에 충성하지 말자. 대신 가족과 친구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자. 사실은 그게 진정으로 국가와 조직을 위하는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