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김웅·손준성·기자들이 삼독해야 할 '막진동'의 책[50雜s]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미디어전략본부장 2021.09.10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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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되었다'/이진동 저

편집자주 [김준형의 50잡스]50대가 늘어놓는 雜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 여전히 나도 스티브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소소한 다이어리입니다.

노안 넷플릭스 100일달리기 음주…이런 것들로 인해 요즘 책과 소원해졌다. 딱히 남한테 추천해줄 만한 것도 별로 머리에 남아 있지 않았는데, '고발 사주(혹은 청부)' 사건이 터지면서 주변에 추천하고 싶은 책 한 권이 떠올랐다.
이진동 뉴스버스 발행인의 '이렇게 시작되었다(부제: 박근혜-최순실, 스캔들에서 게이트까지)'이다. 추천하고 싶은 '주변'을 좁혀 말하면 이른바 '고발 청부' 사건으로 몹시 바빠진 사람들.
윤석열 전검찰총장, 김웅 국민의힘 국회의원, 손준성 대구고검 인권보호관(전 대검찰청 수사정보정책관), 그리고 기자들 특히 사회부 사건 법조기자, 정치부 기자들이다.

흔히들 책을 추천할 때 '일독을 권한다'라고 말하는데, 위 사람들은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은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삼독을 권한다'
책은 이진동이 TV조선 부국장이던 2018년 출판됐다. 알려졌다시피, 이진동은 기획보도 에디터로 있으면서 취재팀을 꾸려, 최순실이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옷을 챙기는 CC TV 영상보도를 시작으로 박근혜 탄핵을 이끈 특종 기사들을 쏟아냈다.
이 책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취재과정과 뒷이야기를 상세히 담고 있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손에 잡고 한 번에 읽어 내려갔을 정도로 긴박감 있고 흥미진진하며 적나라하게 쓴 취재일기이다.



최순실의 등장과 미르재단 K스포츠로 이어지는 국정농단의 현장 복기가 소설보다 높은 몰입도를 이끌어낸다. 재미도 재미지만 언론에 몸담고 있는 독자 입장에서는 2년여에 걸친 취재과정을 통해 어떻게 단편적인 '팩트'가 전체 그림으로 맞춰지고 기사로서의 '스토리'를 완성해가는지를 읽는게 핵심 포인트다.
특히 기자 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초년병들이나, '맨땅에 헤딩'을 숙명으로 알고 박박 기어야 하는 사회부 사건기자, 장막 뒤에 가려진 정치권력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드러내야 하는 정치부 기자들에게 이 책은 살아 있는 교과서다. '청부 고발'같은 복잡한 사건을 다루려면 스캔들 혹은 게이트 보도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그림이 그려지며 확대돼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GPS'가 필요한데, 당사자인 이진동이 쓴 책만큼 좋은 교재가 없을 것이다.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 정작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취재과정에서 브레이크가 걸리고 취재기밀이 새 나갔다. 책이 출간되는 것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이후 이진동의 개인사가 얽히면서 그는 조선일보에서 쫓겨났고, 책 판매도 흐지부지됐다.
오늘 예스24사이트에 들어가보니 그래도 판매지수가 꽤 되고 사회정치분야 '베스트 100'에 3주간 들어갔다는 표시가 떠 있다. 고발 사주 사건으로 관심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요즘 유행하는 '역주행'이 시작된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윤전총장이나 김의원도 정신 없겠지만 '역주행'에 동참해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상대방의 취재 방식과 과거 이력에 대한 학습이 냉정한 판단의 출발점이다.
김의원이 손준성으로부터 여권인사들에 대한 고발장을 건네받아 국민의힘에 전달했다는 뉴스버스의 보도가 나오자 김의원의 반응은 '내가 쓴 것 같다' '보내긴 한 것 같다' '쓴 적 없다' '기억이 없다'로 엇갈리고 꼬였다(하도 말이 오락가락해서 정리하기도 힘들고 대충 그런 내용 같다).
부인과 모호함으로 일관한 김웅의 반응이 나오자 뉴스버스는 이어 김의원이 손검사로부터 받아 제보자에게 전달한 텔레그램 화면을 공개했다. '증거'로 두 번째 타격을 받은 김의원의 말은 더욱 꼬일 수밖에 없게 됐다. 윤 전총장은 보도가 이어지자 "증거를 대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캡처화면이나 고발장 일부가 아니라 고발장 전문이 다른 언론에서까지 증거로 보도됐다. 이른바 '메이저 언론'들도 고삐 끌려 가듯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언론사는 일회성이 아닌 대형 사건 관련 단독 기사를 쓸 땐 기사를 한꺼번에 쏟아내지 않는다. 특히 오프라인 신문 시대가 아니고, 포털의 온라인 제목 한줄로 기억되는 시대에는 핵심 팩트들을 나눠서 순차적으로 보도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사건 관련 당사자의 반응에 따라 이를 반박하거나, 추가로 팩트를 보강해 보도를 이어가는게 베테랑 기자다.
진중권 전 동양대교수가 '청부고발' 보도를 두고 "고발장이 좀 이상하다. 보도는 정직해야 한다"고 시비를 걸고 나오자 이진동은 "진중권이 수사(말장난)와 비평의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사건 취재와 보도는 내가 전문가다"라고 맞받았다.

윤전총장은 8일 기자회견을 열어 삿대질에 가까운 손동작과 '어, 어! 어?' 하는 말투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고발 사주 의혹은 '마이너 언론이 여권과 손잡고 벌이는 비열한 정치공작'으로 규정했다.
'메이저 언론'으로 직접 예를 든 KBS MBC(SBS의 1패)와 서너개 신문사 정도가 윤 전총장이 생각하는 '메이저'인 듯 하다(나는 천상 마이너리거). 하지만 언론의 진정한 메이저 마이너 여부는 설립연도나 회사 외형같은 게 아니라 기사의 무게와 가치에 따라 결정되고, 사안과 영역에 따라 달라진다. 이슈를 리드하는 언론이 메이저다. 적어도 대통령을 꿈꾸려면 철저하게 구시대적 인식에 바탕을 둔 이런 언론관은 빨리 교정해야 한다.


이진동은 조선일보에 몸담고 있다가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한 적이 있어 굳이 이력을 따진다면 보수 정치권과 인연이 있을 뿐이다. 윤전총장이 국정농단 수사로 박근혜-최순실을 구속하고 그 공으로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 됐으니 따지고 보면 이진동은 윤전총장의 오늘을 있게 한 은인인 셈이다. 뉴스버스에 들어가 보면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신랄하게 비판한 기획기사들도 볼 수 있다. 이쪽 저쪽 할 것 없이 막 써 놨다.
'여권의 사주를 받은 정치공작'이라는 공격은 핀트가 안맞는다는 말이다.

첫 직장인 한국일보의 경영상태가 극도로 어려웠던 시절 조선일보로 옮겨갈 때나, 뜬금없이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공천으로 출마했을 때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최근 '은둔기'를 마치고 '뉴스버스'라는 매체를 만든다고 했을 때도 속으론 걱정도 됐다. 제대로 된 기사로 돈 벌기가 하늘의 별따기인데, '협찬 앵벌이→포털 맞춤형 기사 양산→포털 입점(검색 제휴)→검색어 클릭장사→협찬 강요→수익창출'로 이어지는 언론계 표준 창업 코스를 밟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다행히 한국일보 사회부 현장 기자시절, 입사 동기들이 붙여줬던 별명 '막진동'의 모습을 다시 보고 있는 듯 하다.

'막'은 말 그대로 '거칠게' '아무렇게나'라는 뜻의 접두사이다. 초년 기자 이진동이 온갖 군데 막 쑤시고 다니고, 뭐라도 걸리면 막 쓰고, 술도 막 마시고...그런 의미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죠?" 할 때의 막과는 결이 다른 '애칭'이다. 막소주 막회 막국수 막걸리..'막'이 들어간 음식은 대개 거칠다는 의미와 더불어 맛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몰라서 못 쓰는 건 괜찮다. 그런데 알고 못 쓰면 무능한 기자고, 알고도 안쓰면 직무유기다"('이렇게 시작되었다' p137)
박근혜-최순실의 관계에 대해 결정적인 보도를 해야 하느냐를 두고 고민할 때 이렇게 스스로를 다잡았다고 이진동은 쓰고 있다.
청부고발 사건 보도를 보며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용이 다시 떠올랐고, 뒤늦게 추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배 기자들이 원하면 한 권씩 사 줄 용의도 있다. 윤전총장 김의원 손검사도 필요하다면 물론.
이렇게 시작되었다(이진동 지음/개마고원356p/1만6000원이렇게 시작되었다(이진동 지음/개마고원356p/1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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