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에 690억 지급"…국제투자분쟁, 정부 사실상 '판정승'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조준영 기자 2023.06.20 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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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초구 삼성물산 본사. /사진=홍봉진기자 honggga@서울 서초구 삼성물산 본사. /사진=홍봉진기자 honggga@


우리 정부가 미국계 사모펀드(PEF) 운용사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5358만달러(약 690억원)를 배상해야 한다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판정이 5년 만에 나왔다. 엘리엇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개입으로 손해를 봤다며 청구한 7억7000만달러(약 9917억원) 가운데 7%만 인정되면서 정부가 '천문학적 혈세 지출'이라는 부담을 덜게 됐다. 국정농단 사태와 맞물려 쉽지 않았던 국제투자분쟁(ISDS)에서 정부가 사실상 판정승을 거뒀다는 평가가 나온다.

20일 법무부에 따르면 PCA 중재판정부는 엘리엇이 2018년 7월 제기한 중재 신청에 대해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지연이자는 2015년 7월16일부터 판정일인 이날까지의 기간으로 연복리 5%를 지급하도록 했다.



중재판정부는 또 우리 정부가 엘리엇에 법률비용 2890만달러(약 372억5000만원)를, 엘리엇은 우리 정부에 법률비용 345만달러(약 44억5000만원)을 지급하도록 했다. 배상 원금에 지연이자, 법률 비용까지 모두 합치면 우리 정부가 지급해야 할 총 금액은 1300억원가량으로 추산된다.

법무부는 중재 판정 직후 보도자료를 통해 "엘리엇이 청구한 7억7000만달러 가운데 배상원금 기준으로 약 7%만 인용돼 정부가 약 93% 승소한 것"이라고 밝혔다.



법조계에서도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 중 7%만 받아들여지면서 대규모 배상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평가가 나온다. 법조계 한 인사는 "표면적으로는 우리 정부가 엘리엇에 일부 손해를 배상하는 모양새지만 내용면에서 보면 엘리엇이 삼성물산 합병과 맞물린 국정농단 재판 결과를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던 만큼 법무부가 불리한 재판 여건에서 판정승을 거뒀다고 해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엘리엇은 2015년 5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을 발표하자 삼성물산 지분 7.12%를 취득한 뒤 합병비율(삼성물산 1 : 제일모직 0.35)이 삼성물산에 지나치게 불리하다며 합병 반대에 나섰다. 이후 2017년 국정농단 수사에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당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에 찬성 압력을 행사했다는 점이 드러나자 정부의 개입으로 손해를 봤다며 2018년 7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을 근거로 PCA에 투자자-국가간 분쟁(ISDS)을 제기했다. ISDS는 해외 투자자가 투자한 나라의 법령과 정책 등으로 피해를 봤을 때 해당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다.

엘리엇은 중재 과정에서 "한국 정부의 불법적인 개입이 없었으면 국민연금은 합병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우리 정부는 "정부 개입 없이도 국민연금이 합병을 찬성했을 것"이라고 맞섰다. 다만 우리 정부로선 지난해 대법원에서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합병 찬성 압력을 넣은 혐의로 유죄를 확정받으면서 쉽지 않은 법리 다툼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었다.


중재판정부의 판정 내용이 아직 자세하게 전해지진 않지만 엘리엇이 청구한 배상액 가운데 7%만 인용된 결과로 미뤄볼 때 정부 개입이 없었더라도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했을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는 우리 정부의 의견이 폭넓게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정부 개입이 인정됐더라도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행사한 것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성사에 결정적이었는지, 이 때문에 엘리엇이 입은 손실이 주장대로 7억7000만달러에 달한다고 볼 수 있는지 등의 인과관계가 충분히 인정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법무부는 오는 21일 오후 결정문 분석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정부가 중재결과에 불복한다면 28일 안에 PCA에 취소신청을 해야 한다. 법무부 관계자는 "불복 여부는 면밀한 검토 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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