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임종철 디자인기자
최근 얘기가 아니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나올 거라곤 상상도 못했던 2020년 무렵 수도권에서 3선을 지낸 국회의원에게 들었던 고백이다.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면서 국회에선 이미 고소·고발 전쟁이 한창이었다. 상대편 당을 넘어 같은 당끼리도 서로를 탓하다 법원을 찾는 일이 잦았다.
당시 '정치마저 사법에 의지하는 건 무책임하지 않냐'는 반박(?)에 3선 의원이 내놓은 답이 잊히지 않는다. "그렇긴 한데 이게 또 깔끔하긴 합니다."
지난주 신숙희 대법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지켜보다 그때 그 3선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신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의대 증원을 두고 정부와 전공의들이 강대강 대치를 이어가는 데 대해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법원의 영역으로 오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치와 사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사법에서 풀려고 해선 곤란하다는 취지의 얘기였다.
물론 소송할 권리, 법의 판단을 받을 권리는 헌법상의 권리다. 민주주의가 성숙하고 인권이 강해지면 법적 구제를 요구하는 목소리 역시 커진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일 수 있다.
하지만 공동체의 조율과 조정보다 이른바 '갈 데까지 가보자'에 기대는 '소송 과잉'이 바람직할 순 없다. 사회적으로 풀지 못한 강대강 대치를 영화 '타짜'의 대사처럼 "쫄리면 뒈지시든가"를 외치며 법에, 좀더 노골적으로 얘기하면 판사에게 떠넘기는 것은 지난하고 고된 민주적 방식을 포기한 채 '사또'가 내준 결론을 솔로몬의 혜안이라고 위안 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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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면 과잉 소송은 재판 지연이라는 또 다른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 치명적이다. 누구나 내 사건에는 공명정대한 법의 잣대가 적용되길 바라지만 최근 수년 동안 부풀려진 과잉 소송은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법의 결론을 향해 폭주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 대목에서 지난해 말까지 최근 5년 동안 전국 법원에 접수된 재판 관련 민원이 12만건을 넘어선다는 통계(대법원 '전국 법원 민원 접수 및 처리현황 자료)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재판 결과에 대한 불만 민원이 지난해에만 2만2000여건으로 1년 전보다 1.6배 늘었다. 사법부가 법관 증원을 추진하지만 인력 늘리기 같은 단편적 해결책보다 사법만능주의에서 벗어나는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당장은 좋고 편하겠지만 풀기 어려운 문제라고 무작정 "사또 억울합니다"를 외치는 건 결국 스스로 무능에 빠져드는 길이다. '타짜'의 결말엔 "노름꾼의 결론은 하나, 결국 다치거나 죽어"라는 대사가 나온다. 어느 문명, 어느 문화를 가리지 않고 무능을 자인한 끝은 자멸일 수밖에 없다.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지 말자. 그토록 '사또'를 벗어나려 한 수천년 역사의 결실이 오늘의 민주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