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슬픈 실향민'

머니투데이 박종면 편집인겸 더벨 대표이사 부사장 2009.10.01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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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2녀 중 막내였던 내가 어린 시절 늘 다짐한 일이 하나 있다. 나중에 어른이 돼 고향을 떠나 살더라도 추석이나 설에는 꼭 부모님을 찾아뵙겠다는 것이었다.

형 누나들이 모두 서울로 떠난 뒤에도 몇 년을 더 부모님 곁에서 보내면서 명절이면 매번 어머니 아버지가 얼마나 자식을 기다리는지 봤기 때문이다.



특히 어머니는 지금 생각해 봐도 중증이셨다. 일이 생겨서 고향에 가지 못할 것이라는 전화를 받으시고도 명절날이 다가오면 연신 동네 입구만 쳐다보셨다.

고향집은 높은 언덕배기에 있어서 마루에 서서 봐도 동네가 훤히 내려다 보여 누가 오고 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행여 동네 어귀에 택시라도 한 대 들어오면 조바심이 나서 참지를 못하고 누가 왔는지 얼른 뛰어나가 보라며 나를 재촉하곤 하셨다.



아버지는 말씀은 없으셨지만 형과 누나들이 모두 내려오는 때와 그렇지 않은 때 표정이 확연히 달랐다. 식구들이 모두 모여 왁자지껄하면 약주를 연신 들이키시면서 싱글벙글 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몇 해 전 추석 전날 밤 우리 3형제를 당신 곁에 나란히 눕게 하고는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명절에는 고향에 가겠다던 다짐은 대학시절과 직장생활 초기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지켰지만 그 후엔 고향 가는 일이 점점 뜸해졌다.

한식과 추석을 전후해 1년에 두 번 성묘를 다녀오던 게 1년에 한 번 정도로 줄었고, 근년에는 1년 내내 성묘 한 번 가지 않는 때도 있었다. 올해만 해도 지난 6월 고교 동창 모임에 참석하는 길에 잠시 산소에 들른 것을 빼고는 가지 못했다. 형한테 대신 성묘를 부탁하는 일이 잦아졌다.


고향집 앞으로 고속도로가 뚫려 3시간 정도면 갈 수 있게 됐지만 주말조차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이젠 고향집도, 부모님 산소도 까마득하게 됐다.

TV 뉴스로 금강산에서 진행되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그들만이 실향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제 실향민이 돼 버렸다.

그렇다고 걱정하진 않는다. 다시 고향집과 어머니 아버지 산소를 자주 찾게 될 날이 올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형도 그랬고, 주변 사람들도 다 그랬다. 대개 50세를 분기점으로 나이가 드는 데 비례해 고향을 점점 자주 찾는 걸 익히 보아왔다. 나이가 들면 고향 말고는 반겨주는 곳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내 마음의 실향이다. ‘장자’에 '약상‘(弱喪)이라는 말이 나온다. '슬픈 실향민'이라는 뜻이다. 단순함과 소박함의 위대함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비탄이고, 만물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한탄이다. 고향으로의 복귀를 강조하는 것이고, 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는 게 자연의 이치임을 가르치는 말이다.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고,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고, 새끼줄을 묶어 기록하는 문명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하며, 닭과 개 울음소리가 들릴 정도로 서로 마주보고 살아도 늙어 죽을 때까지 오고갈 일이 없는' 그런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의 역설적 표현이다.

이번 추석 연휴에는 못가더라도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꼭 한 번 고향집을 찾아 가야겠다. 간 김에 고향 동네 장터에 들러 청국장과 메밀묵도 맛보고 고향집 지붕에 열렸던 둥근 박도 한두 개 사와야겠다. 하얀 박의 속살을 긁어내 들기름 넣고 볶아주시던 어머니의 손맛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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