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칼럼]李대통령 스스로의 전봇대

머니투데이 홍찬선 기자 2008.04.0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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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칼럼]李대통령 스스로의 전봇대


“50개 생필품의 가격을 관리하겠다.”
“환율 상승은 기업경영에 위험이 된다.”
“운전면허를 따는 데 100만원이 드는 건 문제다.”

최근 들어 이명박 대통령의 말이 화제다. 격식을 차리지 않고 국민들이 불편을 느끼고 있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론함으로써 이른 시일 안에 대책이 나오도록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도 있다. ‘규제 전봇대’를 거론해 수년 동안 방치돼 있던 전봇대를 뽑아버린 것이라든지, 일산에서 초등학생 납치미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직접 경찰서를 찾아가 구태의연한 수사행태를 꾸짖은 일 등이 상큼한 것으로 평가받는 말이다. 법률 용어가 너무 어려워 이 대통령 스스로 유죄인지 무죄인지 헷갈렸다고 한 것도 시대에 뒤떨어진 법률용어를 바꾸도록 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 대통령 '말 정치'의 부작용

하지만 대통령이 지나치게 세세한 것까지 얘기하고, 발언을 자제해야 할 것까지 언급함으로써 부작용이 우려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재무장관마저 모호하게 얘기하는 것이 관례인 환율 문제를 직접 거론하고, 알리안츠생명보험의 노사 문제에 대해 발언한 것이 그런 예다. 50개 생필품 가격을 관리하겠다거나 하루에 220대 밖에 다니지 않는 곳에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만들었다고 얘기한 것도 적절하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는다.



이 대통령이 최근에 ‘말의 정치’를 하는 사정을 이해할 만도 하다. 취임한 지 한달여밖에 지나지 않았고, 그동안 정부부처의 업무보고를 받았으며, 4ㆍ9총선을 앞에 두고 있다는 특수 상황이 그것이다. ‘이명박 실용정부’가 ‘잃어버린 10년’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줘야 총선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해서 향후 5년 동안 국정을 뜻한 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대통령이 말을 많이 함에 따른 부작용들이 눈에 띄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장관을 비롯한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다. 대통령이 세세한 것까지 거론하면서 장관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 규정에 정해진 것을 빼고 모든 규제는 없앤다는 네가티브 시스템으로 바꾸어야 규제완화가 이뤄진다. 하지만 정작 대통령은 매일 고쳐야 할 것을 지시하는 포지티브 시스템으로 업무지시를 하기 때문에 자율적이고 창발적인 장관보다 지시사항을 착실하게 이행하는 교조적인 장관으로 만들어간다.

게다가 대통령의 잦은 발언은 상황을 꼬이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한다. 대통령이 환율이나 생필품 가격을 직접 언급하면 얽히고설킨 경제문제를 효과적으로 푸는데 어려움을 겪게 마련이다. 대통령이 얘기했는데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대통령의 말은 신뢰가 떨어지고 권위도 잃게 되는 비용을 치르게 된다.


과거의 건설ㆍ토목 패러다임에서 미래의 공감 패러다임으로 변해야

이 대통령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건설회사 CEO와 서울시장을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자신감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1970~80년대의 건설사 및 2000년대 중반 서울시장과 현재 대한민국 대통령의 성공법칙은 다르다. 과거의 성공은 CEO가 앞서 몰아붙이면 가능한 ‘단선적 건설ㆍ토목 패러다임’이었다면 지금은 이해관계자들의 다양하고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야 성공할 수 있는 ‘복합적 감성 패러다임’ 시대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고 잡기도 어려운 무형자산(Intagibles)이 중요한 시대에는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챙기는 것이 불가능하다. 유능한 참모들이 자발적으로 창의적 해결책을 내놓도록 권한을 위임(Empowerment)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대통령이 밝혔듯이 "아무리 변화와 개혁을 얘기해도 일선 창구가 바뀌지 않으면 국민이 체감하지 못한다.”

규제완화와 개혁은 마라토너나 장기판 졸(卒)처럼 느리더라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뜻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 대통령이 '말의 정치'로 밖의 전봇대를 뽑는 데만 주력하지 말고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전봇대(내가 가장 똑똑하고 나만이 당면한 개혁을 할 수 있다는 생각)를 뽑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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