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 화재 붕괴는 인란(隣亂)이었다

머니투데이 홍찬선 기자 2008.02.12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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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붕괴가 슬프고 답답한 이유

한국의 아이콘이었으며 한국인의 자존심이었던 숭례문을 화마(火魔)의 제물로 사라지게 한 사람이 백발노인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앞으로 살 날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훨씬 적을 70세 노인이 토지보상비를 제대로 받지 못한 분풀이로 숭례문에 불을 질렀다는 사실은 우리를 허탈하게 한다.

숭례문이 불타 붕괴된 것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우리의 이웃에 의한 인란(隣亂)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무섭게 한다. 임진왜란(倭亂)은 물론 병자호란(胡亂)을 꿋꿋이 버텨내고 한국전쟁(同亂)마저도 이겨낸 숭례문이 힘없고 한 많은 한 노인에 의해 허무하게 사라졌다는 사실이 우리의 할말을 앗아 간다. 일본인과 여진족에 의한 외침(外侵)과 골육상쟁의 내침(內侵)보다도 한 병(1.5ℓ)의 시너와 라이터 1개가 더 강력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전율하게 한다.



한을 품은 노인이 종묘와 지하철 등을 노렸으나 인명피해가 클 것을 고려해 한적한 숭례문을 노렸다고 한 말은 우리를 떨게 한다. 숭례문에 불을 지른 70세 노인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잠자리를 불안하게 한다.

‘고도의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해 정보화 사회라고 불리는 21세기는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빅 브라더를 걱정해야 한다’는 상식을 뒤엎고, 우리의 옆에 있는 이웃을 더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한다. 핵폭탄을 대기권에서 요격할 수 있는 최첨단 무기보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이 월드트레이드센터를 한방에 날려 보냈다는 사실을 잠시 잊었던 것이 우리를 두렵게 한다.



그리하여 매일 인사하고 악수하는 이웃을 다른 눈으로 쳐다봐야 하는 현실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학교에 가거나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아이들에게 이웃집 아저씨를 조심하라고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그런 고통과 안타까움이 깨끗하게 가시고 밝은 미소로 이웃과 포옹할 수 있는 날이 요원하다는 사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숭례문의 붕괴는 인란(隣亂)이 일어날 수 있음을 예고했던 수많은 사인들을 무시한 결과라는 점에서 우리를 채찍질한다. 이웃을 사랑하고 따뜻하게 대접하는 연민(憐憫)의 마음을 갖지 못하고 그들과의 벽을 높여온 우리들의 마음 없음을 부끄럽게 한다. 잘못은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내 것은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하는 우리의 탐욕을 죄스럽게 한다.

인란(隣亂)으로 무너진 숭례문에 조사를 받치고 조화를 올리는 것으로 우리의 죄스러움이 씻어지기를 바라는 얄팎한 마음이 우리를 얄밉게 한다. 숭례문 붕괴가 모두 네 탓이라고 발뺌하고 전가하는 무책임이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숭례문 붕괴 같은 인란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사후약방문일지언정 확실한 방문(方文)을 마련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우리의 자화상은 우리를 참혹하게 한다.


이 모든 슬픔과 안타까움과 우울과 참혹 등이 모두 합해 내일 어떤 인란(隣亂)이 일어날지 걱정하게 하는 현실이 우리를 답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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