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아우토반의 자유에 대한 단상(斷想)

머니투데이 김윤태 한국외대 교양학부 교수(코트라 전 부사장) 2024.09.19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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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는 저 멀리 뒤에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망설임 없이 본선으로 진입해야 한다. 추월 차선인 1차선에 들어갈 때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 눈 깜짝할 사이 고급 경주용 차가 바짝 붙어 번쩍번쩍 차선 옮기라는 신호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냥 속도가 무서운 것만은 아니다. 독일인들은 속도 무제한 아우토반을 '자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독일의 아우토반은 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부터 시작했다. 길이는 전체 1만3000km에 이르며, 70% 정도가 속도 무제한으로 운영된다.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본격 추진된 아우토반은 세계 첫 고속도로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다룸슈타트까지 최초 구간은 1935년 개통했다고 한다.



독일이 세계 굴지의 자동차 대국으로 성장한 데는 아우토반의 역할이 컸다. 최근에는 탄소 배출량과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줄인다는 명분 하에 속도를 제한해야 한다는 논쟁이 없는 것은 아니나, 순수한 산업의 관점에서만 보면 오늘날 독일 자동차 산업이 있기까지의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다. 내연기관 신기술, 신제품 개발 테스트가 모두 아우토반에서 이뤄졌다. 규제 샌드박스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독일 자동차 업계는 글로벌 고객에게 선택받고자 빠르고 안전한 차량 제조를 위한 연구개발(R&D)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코너링 등 기술적으로 뛰어날 뿐 아니라 내구성도 훌륭한 제품들을 끊임없이 시장에 선보였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쟁력이 싹텄고, 오늘날의 세계적인 브랜드에 독일 자동차가 상위를 차지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텔슈탄트라 불리는 풀뿌리 중소기업도 동반성장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최근 독일 자동차 산업이 휘청이고 있다고 한다. 유럽 최대 자동차 업체인 폭스바겐이 창사 87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 내 공장 폐쇄'라는 극약 처방을 검토하고 나섰다. 이러면 연쇄적으로 보쉬, 콘티넨털, ZF 등에서 일하는 수십만 엔지니어들의 대규모 실업 사태가 예상된다.

독일 자동차 업계가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내연기관 성공에 취해 전기차로의 흐름이라는 환경변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점, 배터리와 IT 소프트웨어 측면에서 경쟁기업들에 비해 기술력이 떨어지는 점 등 복합적이지만, 전문가들은 유럽의 급진적 환경 규제와 관료주의 또한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한다.

최근 여러 규제로 인해 BMW, 폭스바겐의 대규모 투자가 지연되거나 취소돼 적기에 기술개발이 어려워진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했다고 한다. EU는 전기차 타이어·브레이크 등에서 발생하는 유해성 미세 입자 배출까지 규제하는 '유로7′을 곧 시행할 예정이다. 과도한 정부의 규제와 간섭은 기존의 마차 산업을 보호하려다 초창기 자동차 산업 발전을 저해했던 영국의 적기조례를 연상케 한다.


비교적 한산한 토요일 아침 빠른 속도로 아우토반을 질주하면서 느끼는 자유로움은 창의성,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열정을 한껏 자극한다. 아우토반에서 무한 기술혁신으로 경쟁하던 독일 완성차 업체들과 자동차 부품 기업들이 향후 10년 뒤에도 전 세계 자동차 산업에서 현재와 같은 지위를 고수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김윤태 한국외대 교양학부 교수(코트라 전 부사장)김윤태 한국외대 교양학부 교수(코트라 전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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