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이 사는 길"…'단역배우' 자매의 죽음[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박효주 기자 2024.08.2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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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집단 성폭행으로 끝내 세상을 등진 A씨가 출연했던 드라마 화면 일부. /사진=JTBC 갈무리집단 성폭행으로 끝내 세상을 등진 A씨가 출연했던 드라마 화면 일부. /사진=JTBC 갈무리


"죽는 길만이 사는 길이다."

2009년 8월 28일 오후 8시 18분 18초. 한 아파트 18층에서 30대 여성이 이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투신했다. 세상에 대한 원망의 말을 남기기 위해 일부러 욕설과 발음이 비슷한 날짜와 시간에 맞춰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른바 '단역배우 집단 성폭행' 사건이다.

얌전했던 딸, 일하고 오면 "죽여야 해" 말 되풀이
사건은 2004년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A(당시 30)씨는 방송국에서 백댄서로 활동하던 동생 B(당시 26)씨 소개로 단역배우(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A씨는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단역배우 일을 이어갔다. 그런데 평소 차분하고 조용했던 그가 일하면 할수록 이상하게 변해갔다.

일하고 돌아오면 이유 없이 벽을 때리는 등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고 사람들 이름을 언급하며 "죽여야 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A씨는 자신을 말리던 엄마와 동생에게 평소 입에 담지 않던 욕설을 하는가 하면 때리기까지 했다. 결국 정신병원에 가게 됐고 상담 중 A씨가 이렇게 달라진 이유가 드러났다.

4개월간 이어진 협박과 성폭행…총 12명 가담
성폭행 사건으로 고통받다 극단 선택을 한 두 여성. /사진=유튜브 채널 KBS 교양 갈무리성폭행 사건으로 고통받다 극단 선택을 한 두 여성. /사진=유튜브 채널 KBS 교양 갈무리
A씨의 고백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단역배우들을 관리하는 기획사 반장, 보조 반장 등 12명에게 4개월 동안 성폭행,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A씨가 첫 피해를 본 건 단역배우로 활동한 지 약 한 달 뒤인 8월부터였다고 한다. 반장 C씨가 술을 먹이고 성폭행했다.


C씨는 자신의 범죄에서 끝내지 않고 그해 10월부터는 다른 반장들에게도 A씨를 음란한 여성으로 소개했다. 이후 A씨는 촬영지 모텔 등에서 현장 반장, 부장, 캐스팅 담당자 등에게까지 성폭행이나 강제추행을 당했다.

이들은 A씨에게 "어디 가서 말하면 네 동생과 엄마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또 "동생을 팔아넘기겠다"며 겁을 주기도 했다.



A씨는 반장들에게 성폭행당하면서도 해코지가 두려워 아무 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피해자에게 "성기 그려봐라"…경찰들 대놓고 2차 가해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나자 A씨 모친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조사하는 경찰관들로부터 2차 가해를 당한 것이다.

A씨 모친에 따르면 당시 경찰 조사에서 한 수사관은 A씨에게 가해자 성기 색깔과 둘레, 길이 등을 그려오라고 종이와 자를 줬다. 또 성폭행 상황을 묘사해 보라고 하며 A씨를 보고 수사관들끼리 웃었다고 한다.



보다 못한 A씨 모친은 A씨를 끌고 경찰서를 나왔다.

이후에도 경찰은 조사에서 "피의자가 가슴을 움켜잡았다면 소리라도 질러야 되고 상대에게 반항이라도 해야 되지 않냐", "피의자는 가슴을 움켜잡지 않았다는데 그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나" 등 질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경찰 조사 방식과 가해자들의 지속적인 협박을 견디지 못한 A씨와 가족은 2년 만인 2006년에 고소를 취하했다. A씨가 남긴 메모에 적힌 고소 취하 이유는 "힘들어서요"였다.



"가해자는 12명이지만 딸을 죽인 건 경찰"
집단 성폭행 피해를 입은 후 극단선택을 한 A씨가 남긴 유서 일부. /사진=JTBC 갈무리집단 성폭행 피해를 입은 후 극단선택을 한 A씨가 남긴 유서 일부. /사진=JTBC 갈무리
고소 취하 후 A씨는 3년간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억울함과 분노, 그동안 쌓인 상처는 끝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A씨는 2009년 8월 28일 오후 8시 18분 한 아파트 18층에서 몸을 던졌다.

주목할 부분은 '18'이란 숫자다. A씨는 이날 낮에 자신이 뛰어내릴 장소를 사전 답사까지 하며 시간까지 정확히 맞췄다. 생에 마지막 세상을 향해 '18'이라고 강한 분노를 표한 셈이다.

A씨가 남긴 유서 형식의 메모에는 '난 그들의 노리개였다',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A씨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여동생 B씨도 6일 뒤인 9월 3일 목숨을 끊었다. B씨는 유서에 "엄마는 복수하고 오라"고 적었다. 두 딸의 잇따른 죽음에 충격을 받은 피해자 부친은 그해 11월 뇌출혈로 사망했다.

A씨 모친은 과거 CBS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고소 때문에 가족이 다 죽었다. 내가 죄인"이라며 "성폭행 가해자들은 12명이지만 죽게 만든 건 경찰"이라고 분노했다.

홀로 남은 모친…1인 시위 벌이며 가해자 처벌 요구
성폭행 사건으로 두 딸과 남편을 잃은 여성이 1인 시위를 벌이는 모습. /사진=유튜브 채널 KBS 교양 갈무리성폭행 사건으로 두 딸과 남편을 잃은 여성이 1인 시위를 벌이는 모습. /사진=유튜브 채널 KBS 교양 갈무리
피해자 죽음에도 가해자들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억울한 A씨 모친은 형사고소 취하로 재고소가 불가능하자 이들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공소시효가 만료된 상태여서 패소했다.



A씨 모친은 1인 시위에 나섰다. 그의 노력 덕분일까 경찰은 2018년 사건 진상 조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경찰 조사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일부는 조사를 거부하면서 어떤 진전도 이뤄지지 않았다.

A씨 모친은 이후에도 1인 시위를 이어갔고 결국 가해자들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공권력이 범한 참담한 실패와 이로 인해 가중됐을 A씨 모녀의 고통을 보면서 깊은 좌절과 슬픔을 금할 수 없다"며 공권력의 잘못을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현재도 A씨 모친은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2019년부터는 유튜브 채널을 열어 가해자 이름과 사진을 공개하며 처벌을 호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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