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 각자도생의 헬조선 떠나고픈 청춘들의 고뇌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4.08.2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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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엔케이컨텐츠사진=㈜엔케이컨텐츠


다분히 도발적이다. ‘한국이 싫어서’라니, 딱히 애국자는 아닐지라도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의 저항을 안기는 제목 아닌가. 한창 ‘헬조선 담론’이 일었던 2010년대 청춘의 마음을 낱낱이 짚어 젊은 층의 공감을 얻었던 장강명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한국이 싫어서’는 도발적인 제목만큼이나 맥을 잘못 짚기 쉬운 작품이기도 하다.

가족과 오래된 연인을 뒤로 하고 뉴질랜드로 떠나는 20대 후반 여성 계나(고아성). 계나가 한국을 떠나는 이유는 심플하다. 두 마디로는 ‘한국이 싫어서’, 세 마디로는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물론 누구나 자신의 고국을 싫어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어쨌거나 태어나 평생을 자란 땅을 벗어나려고 할 때는 제법 비장한 이유가 있을 법도 한데, 영화에서 보여주는 계나의 이유들은 사람들에 따라 ‘겨우 그 정도로?’라고 반문할 법도 하다.



계나와 계나를 둘러싼 환경은 어찌 보면 무척 평범하다.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나와 금융회사 IT 부서에서 일하는 20대 후반 여성. 인천에서 강남까지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타는 고난의 출퇴근을 겪지만, 뭐 그 정도는 대한민국 직장인들 대부분 그렇지 않느냐고 할 법하다. 재개발을 앞두고 24평 아파트로 옮기기 위해 딸에게 적금을 깨어 보태 달라는 의사를 비치는 부모가 있지만, 집안이 적당히 가난할 뿐이지 그렇다고 몰상식한 부모로는 보이지 않는다. 경제적 수준 차가 많이 나는 남자친구 지명(김우겸)의 집안에서 계나를 마뜩잖게 대하지만, 당사자인 지명은 계나와 결혼을 원하니, 이것도 크게 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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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모든 문제들은 상대적이다. ‘겨우 그 정도로?’라고 입 모으는 남들의 시선 또한 누군가에겐 다분히 폭력적일 수 있다. 추위를 많이 타는 계나는 자신이 동화책 ‘추위를 싫어한 펭귄’의 펭귄 파블로 같다고 여긴다. 사방이 추운 남극에서 모두가 추위에 능숙한 펭귄일 때, 저 혼자 목도리를 두르고 난로를 쬐는 펭귄은 경쟁력이 없을 수밖에 없다. 기본 원칙을 지키려는 자신에게 융통성이 없다고 말하는 직장 상사, 엄연히 남자친구와 같은 대학에 같은 과를 나왔음에도 집안의 처지 등으로 대놓고 자신을 낮게 보는 남자친구의 부모,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다른 맥락의 보편적 정서로 받아들이는 남자친구 등에 둘러싸여 있는 계나는 그 모든 상황이 폭력적이고, 그 상황에 처한 자신이 경쟁력이 없다고 여긴다.

영화는 한국의 계나와 뉴질랜드로 떠난 계나, 다시 한국에 잠시 들른 계나를 교차하며 보여주며 관객에게 두 공간의 삶을 비교하며 지켜볼 수 있게 만든다. 여기서 관객의 평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배고프고 춥지만 않으면, 나는 그게 진짜 행복이야”라던 계나가 뉴질랜드에서 보낸 시간들이 정말 한국에선 불가능했던 걸까 하는 의문이 남기 때문. 이는 영화가 뉴질랜드로 떠난 계나의 삶을 다소 납작하게 그려낸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과 달리 만면에 미소를 띤 계나를 보여주지만 계나가 추구한 삶이 어떤 것인지 설득력 있게 혹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아 공감이 덜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얻지 못한 행복이 저곳에 있을 거란 막연한 환상으로 버무리는 건 아니다. 뉴질랜드에도 보이지 않는 계급이 있고, 인종차별이 있고, 그곳에서 몇 년간 살았어도 적응하지 못하는 한국인들이 있음을 조금씩이나마 보여준다.

원작소설이 나오던 2015년은 헬조선이란 단어가 공공연하던 때였다. 지금은 헬조선이란 단어가 다소 낡은 듯한 느낌을 주지만 영화가 개봉하는 2024년의 한국은 여전히 스스럼없이 행복을 이야기하기 쉽지 않은 나라다. 아이를 낳고 싶지 않고, 결혼을 넘어 연애까지 포기한다는 청춘이 많은 나라를 행복하다고 말하긴 어렵지 않을까. 심지어 원작소설 이후로 한국은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과 ‘N번방 사건’, ‘이태원 참사’ 등을 겪었다. 강남으로 출근하던 20대 청년 여성 계나가 충분히 겪을 수 있었던 그 사건들을 곱씹다 보면 설령 대안이 없을지언정 한국이 싫어서 떠난다는 말에 수긍을 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사진=㈜엔케이컨텐츠사진=㈜엔케이컨텐츠
고아성이 연기한 청춘의 얼굴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에 공감하던 사람들이라면 왕복 4시간 남짓한 출퇴근에 시달리며 삶에 지쳐가는 계나의 모습에 또 다시 공감할 법하다. ‘지잡대’를 나오고 뉴질랜드에서 요리를 시작한 재인으로 분한 주종혁, 계나와는 달리 한국에서 어떡하든 적응하려 고군분투하는 지명 역의 김우겸 등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각각의 청춘들도 젊은 관객들이 이입할 수 있는 여지가 크다.



계나의 선택에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한국이 싫어서’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란 말이 자연스러운, 극단의 생존주의가 만연한 작금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 대해 곱씹는 시간을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나는 지금 이곳에서 경쟁력이 있는가, 나는 지금 행복한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나는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나 등등 청춘은 물론 청춘이 아니어도 현생을 살아가는 모든 이의 고민을 다시금 환기시켜준달까. 그러니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다른 맥을 짚더라도 시간이 아깝지는 않을 것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로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등을 수상한 장건재 감독의 신작 ‘한국이 싫어서’는 8월 28일 개봉한다. 러닝타임 107분. 영화 관람 전후로 원작소설을 함께 읽으면 더욱 다채로운 사고(思考)와 감상이 가능할 것이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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