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단위 물건을 중고거래할 가능성은 높지 않으니 피해금액 측면에서는 기존 범죄만큼 심각하지 않다고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이중의 피해자를 만들고 선의의 피해자들 사이에서 또다시 분쟁을 일으키게 한다는 측면에서 기존 범죄 못지않게 나쁜 범죄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원심은 원고와 피고 사이에는 계좌이체의 원인이 되는 법률관계가 존재하지 않으니 부당이득이 성립하고 피고에게 악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 봐 원고의 청구를 인용했다. 피고가 수천만 원 상당의 귀금속을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매도하면서 상대방의 인적사항을 최소한으로도 확인하지 않고 실제 자신이 만난 상대방이 매매대금을 송금한 것이 맞는지, 상대방과 입금자의 관계는 무엇인지 등을 전혀 알아보지 않았다면 악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인정되고 원고가 실제 출금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보이스피싱 범죄자가 무단으로 원고의 계좌를 이용해 피고 계좌의 돈을 이체한 것이므로 반환청구의 필요성이 더 크다고 봤다.
사실 원고와 피고 모두 피해자인데 정작 책임져야 할 범죄자는 빠진 상태에서 피해자 간에 법적 분쟁까지 발생하다니 그저 안타까운 일이다. 누구 한쪽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 법원도 정말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 결국 원심은 보이스피싱의 직접 피해자를, 대법원은 중고거래 시장의 거래질서를 더 보호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의 판단이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원고가 범죄의 원인을 제공했으니 책임이 있다는 취지의 논거를 든 것은 다소 아쉽다. 원고에게 잘못은 없지만 거래안전이라는 가치를 더 보호할 필요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었을까. 보이스피싱의 피해자는 잘못이 없다.
김태형 변호사(법무법인 지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