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와 '악귀'의 진득한 설계자, 김은희 작가

머니투데이 박현민(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3.07.27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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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스튜디오S사진=스튜디오S


SBS 금토드라마 '악귀'(극본 김은희, 연출 이정림)는 괴이하다. SBS라는 채널명을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기존의 지상파 드라마라 생각하기 힘들 만큼 플랫폼의 전형성을 탈피했고, 단순히 호러라고 명명하기엔 좀 밍밍한 맛이 있다. 그렇다고 수사물이라고 하기엔 스토리가 약간 헐겁다. 물론 그것이 극의 재미를 덜어내거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진 않는다. 도리어 '악귀'는 첫 회부터 기대 이상의 흡인력을 발휘해 시청자를 빠르게 매료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호러와 오컬트가 결합된 낯선 비주류 장르를 안방 극장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중이다.

배우 김태리의 존재는 분명한 전력이었다. 김태리는 N년차 9급 공무원 준비생이자 스물다섯 흙수저 청춘 '구산영'을 맡아 본디 존재조차 몰랐던 아버지(진선규)의 장례식에 방문했다 갑작스럽게 '악귀'에 씌게 되고, 이후 1인 2역에 가까운 '빙의' 연기를 완벽하게 선보인다. 로맨스는 애초에 없다. 웃기거나 통쾌하지도 않고, 어둑어둑한 화면에 꿉꿉하고 습한 스토리가 화면으로 덕지덕지 묻어나고 번진다. 확실히 '요즘' 안방극장에서 선호하는 분위기와는 다소 거리가 느껴진다. 이런 특징은 타사의 경쟁 드라마와 구획을 완연하게 분리시켰고, 충성도 높은 시청층 확보를 확보하기도 했다.



물론 섬뜩한 '악귀'를 탄생시키고, 극을 이끌어 가는 것은 철저히 김은희 작가에서 비롯된다. 김 작가는 당초 말맛과 멜로보다는 다채로운 떡밥과 촘촘한 서사, 취재로 점철된 세계관, 인물 간의 의도적 혹은 비의도적 연결,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뱉어내게 만드는 인과율을 기어이 끄집어내 보여주는 설계에 능숙하다. 예고 없이 맞닥뜨린 '악귀'의 존재와 탄생 배경, 그리고 그것의 소멸을 위해 여러 캐릭터들이 엉성하게 얽혀 방향을 틀어가며 달려가는 모습은 위태하지만 숨을 참고 지켜보게 만드는 신묘한 힘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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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귀'의 시퀀스는 김은희 작가가 설계한 또 다른 작품 '킹덤'을 떠올리게도 만든다.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역병으로 창궐한 조선의 좀비 '생사역'은, 현대의 '악귀'로 유사하게 갈음된다. 인간의 살점을 이빨로 잔혹하게 물어뜯는 것을 대신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강제해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행위다. '킹덤'의 스핀오프 '킹덤: 아신전'을 통해 드러난 것처럼 사회적 약자가 분노해 모두의 파멸을 바라게 되는 모양새도 왠지 '악귀'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다. 차별과 핍박은 타인을 향한 날카롭고 잔혹한 분노로 치환된다.

과거와 현재가 면밀하게 연결돼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김은희 작가의 최대 히트작 '시그널'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더욱이 과거와 무전이 되는 판타지적 행위와 '악귀'가 빙의된 초자연적인 현상을 겪는 구산영(김태리)이 만들어내는 서사에는, 어느 누군가의 간절함 염원 같은 것이 공통적으로 스며있다. 해결하고 싶었던 오래된 미제 사건을 파헤치는 수사 행위는, '악귀'에서 보이스피싱, 학교폭력, 아동학대, 악덕 사채업 등 현존하는 삿된 이슈들과 긴밀하게 맞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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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작가의 작품은 늘 인간에 대한 진득한 관심과 관찰이 바탕에 철저히 깔려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반드시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가 주제를 형성해 단단한 뿌리를 내린다. '싸인'과 '유령', '시그널'과 '킹덤'을 보고 나서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는 어떠한 꿉꿉한 감정 같은 것은 김은희 작가가 흩뿌려둔 씨앗의 잔여물인 셈이다. 명확한 해피엔딩이 안겨주는 희열은 부재하지만, 이렇게 뻗어나간 줄기가 만들어낸 사고의 확장은 조금이나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

총 12부작으로 구성된 '악귀'는 이제 종영까지 단 2회 만을 남겨둔 상태다. 후반부 곳곳에 반전을 장치하고, 결말이 닿을 듯 말 듯 한 현시점에서 기존의 떡밥을 충실하게 회수하며 나아가는 '악귀'가 의외의 엔딩을 던져주고 우리 머릿속을 헤집어 놓을지 걱정되면서도 내심 기대도 된다. '악귀'가 막을 내리면, 본 방송을 어떻게든 챙겨보던 금요일과 토요일 밤 10시가 좀 헛헛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조만간 '시그널 시즌2'나 '킹덤 시즌3'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다시 펼치고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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