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굴곡진 근현대사를 관통한 3대의 대서사시

머니투데이 정명화(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4.09.10 11:16
글자크기

원작서 빠져나온 듯한 김민하의 연기 압권

사진=애플Tv+사진=애플Tv+


역사의 거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잡초처럼 강인하게 삶의 뿌리를 내린 윗세대들의 이야기. 그들의 거칠고 고단했던 여정, 고난 속에서도 꽃을 피운 한 가족의 사랑과 상처의 서사가 섬세한 감성으로 되살아나 깊은 여운을 전한다.

애플TV의 역작 '파친코'가 시즌 1의 호평을 업고 시즌2를 공개했다. 8월 말 에피소드 9를 시작으로 시즌1의 연장선상임을 표명한 시즌2는 이민자 세대의 고된 삶이 자취를 다시금 이어간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얽힌 이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역사의 파편들을 마주하고, 그 속에서 미처 알지 못했던 지나간 우리 민족의 인생을 만나게 된다. 섬세하고 수려한 미쟝센과 주인공 '선자'를 영상 속으로 옮겨놓은 듯한 김민하의 호연, 잔잔하지만 흥미로운 스토리 전개로 보기드문 웰메이드의 가치를 여실히 드러낸다.



사진=애플TV+사진=애플TV+
현재 3화의 에피소드를 공개한 시즌2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선자를 아내로 맞은 이삭의 죽음과 폭격을 피해 시골 농장으로 이주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시즌2의 첫 에피소드에서는 감옥에 간 이삭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이끄는 선자와 아들 노아를 그림자처럼 돕는 한수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시장에서 김치를 팔던 일도 더이상 할 수 없게 된 선자는 밀주를 만들다 체포되고 석방을 위해 뒤에서 힘을 써준 한수와 12년만에 재회한다.



한수의 도움을 거절하던 선자는 남편 이삭을 석방시켜주면 한수의 뜻을 따르겠다 약속하고 석방된 노아는 오랜 옥고로 상해버린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살고 싶다는 그의 간절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집에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노아는 선자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오사카에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자 선자는 한수와 그의 수하인 김창호의 도움을 받아 시골농장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삶을 꾸리고 한수는 선자 가족을 살뜰하게 돌본다. 이들 가족과 함께 지내던 창호와 경희 사이에는 애틋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다.

사진=애플Tv+사진=애플Tv+
미국 이민자 가정에서 자란 경험을 토대로 이민진 작가가 집필한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 '파친코'는 한국과 일본의 복잡한 역사적 관계를 배경으로, 3대를 걸쳐 진행되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린다. 두 나라의 근현대사 속에서 개인들이 겪는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통해 당대의 시대적 배경과 문화, 언어, 장소를 다채롭게 담아내 이국적이면서도 동질감을 안겨주는 독특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를 넘나드는 대사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적응해가는 인물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엿보게 하는 한편,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드러내는 도구로 활용된다.


여러 세대에 걸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흥미롭다. 시대와 시대를 점프하고 교차편집하는 방식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는 한편, 한 가족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스토리의 연속성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촬영 기법과 시각적 표현은 '파친코'를 수작으로 손꼽게 하는데 최고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매 장면은 한편의 사진 혹은 그림처럼 아름답고 각 시대의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낸다. 50여년에 걸친 시간은 이렇게 공들인 묘사와 정교한 영상미를 통해 생명을 얻고 마치 그 시대 속에 들어가 인물들의 삶을 함께 엿보는 듯한 사실감을 전달한다.

사진=애플TV+사진=애플TV+


수려한 영상미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와 어우러져 담담하게 감정을 쌓아올리며 보는 이를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흡입력 있게 끌어당긴다. 원작 소설에서 빠져나온듯한 김민하는 수줍고 영민한 섬처녀가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갖고 일본까지 건너와 남편 없이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억척스럽고 강단있게 변모해가는 '선자'의 모습을 나무랄데 없이 연기했다. 원작과 괴리감있는 캐릭터로 지적돼 온 '한수' 역의 이민호는 시즌1보다 늘어난 분량으로 묵직한 존재감을 발산하며 앞으로 전개될 활약에 기대를 갖게 한다. 이 작품의 중심 축인 윤여정은 독보적인 연기로 한인 이민자 할머니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긴 세월을 겪어내며 단단해지고 깊어진 연륜, 삶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작품의 감정적 깊이를 더해주는 한편 이들 이민가족 3세대를 잇는 기둥으로서의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시각적 아름다움, 뛰어난 연기력, 그리고 깊이 있는 이야기 전개로 오랜만에 웰메이드 수작의 가치를 일깨운 ''파친코'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 인생의 의미와 정체성, 그리고 역경을 이겨내는 힘에 대해 진중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다양한 언어와 문화적 배경을 넘나드는 이 서사시는 자신이 처한 문화와 국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른 울림과 여운을 갖게 하는 작품이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