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4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AFP=뉴스1
세계사의 전환이 시작된 건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이다. 서울올림픽은 양쪽 진영 160개국이 동시에 참가, 냉전 종식을 알리는 축제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듬해인 1989년 6월 중국에서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고, 같은 해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91년에는 소련 연방이 해체됐다.
모스크바 법대 졸업한 인재…소련 공산당서 초고속 승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99년 백혈병으로 숨진 부인 라이사의 장례식장에서 딸과 함께 슬픔에 빠져 있다. /ⓒ AFP=뉴스1
그는 소련 공산당 최연소 정치국원을 거쳐 1985년 서기장, 1988년 소련연방최고회의 간부회의장에 올랐다.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1990년 대통령제를 신설한 소련 연방이 1991년 해체됐기 때문이다.
부인 라이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99년 부인이 백혈병으로 숨진 뒤 고르바초프는 "라이사가 떠난 후 삶의 의미를 잃었다"며 "여러 달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처박혀 지냈다"고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이 시각 인기 뉴스
고르비가 없었다면, 독일 통일도 쉽지 않았다
199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정상회의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오른쪽)이 헬무크 콜 독일 총리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 AFP=뉴스1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의 독일 통일 지지 요청에 고르바초프는 순순히 응했다. 당시 동독에는 소련군 50만명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르바초프가 반대했다면 독일 통일은 불가능했다. 통일이 이뤄졌더라도 평화적인 방식이 아닌 피의 대가를 치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소련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군대를 철수할 비용조차 없었는데 고르바초프는 무조건 독일 통일에 찬성한 뒤 나중에 군 철수 비용을 독일에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세계 냉전을 종식하고 독일 통일을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왼쪽)과 故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 하는 모습/사진=뉴스1
"고르비가 나라 망쳐"…러시아 우익들의 혹평
미하일 고르바초프 자서전 표지
고르바초프는 199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0.5%라는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전 세계에 평화를 선물했지만 러시아 내부에선 미움을 받았다. 우익 성향 국민들은 "소련을 망하게 한 장본인"으로 평가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며 "역사를 바꿀 수 있다면 손대고 싶은 사건"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 2004년 퓰리처상을 받은 윌리엄 타우브만은 고르바초프의 삶을 저술한 책에서 "소련을 스스로 무너뜨림으로써 인류를 구했지만, 자신은 정치적으로 몰락한 고르비는 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1999년 9월 독일 베를린 벨뷰 궁전에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오른쪽)이 다정한 포즈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AFP=뉴스1
지난 2007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오른쪽)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 AFP=뉴스1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재단 성명을 통해 당장 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고르바초프 재단은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첨예한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호 존중과 이익에 입각한 협상과 대화가 유일한 방법"이라는 입장을 내놨다. 러시아는 즉각 적대 행위를 멈추고 평화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 /ⓒ AFP=뉴스1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에 따르면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된 이후 이달 21일까지 1만3477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는 지난 1일 기준 개전 이후 우크라이나를 탈출한 난민 수가 1017만800명이라고 밝혔다. 2차 대전 이후 발생한 최대 규모다.
고르바초프의 사망 소식을 접한 이 날, 이 같은 역사적 상상을 해본다. '소련을 해체해 세계 냉전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고르바초프가 러시아 정권 장악에 성공했다면 오늘날 미치광이 푸틴을 마주하지 않았을 텐데. 아마도 푸틴은 소련시절 비밀경찰인 KGB에서 은퇴해 시골마을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지 않을까.'
거동이 불편해 수행원들의 부축을 받아 이동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AP=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