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인간 사회를 떠받치는 세 기둥

머니투데이 최연구 (과학문화칼럼니스트·럭스로보 고문) 2021.10.2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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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 영국 소재 유럽연합(EU) 산하기구는 유럽 본토로 이전했다. 2019년 유럽의약품청(EMA)은 파리로 옮겼다. 파리는 세계에서 국제기구가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다. 파리에 있는 거대 국제기구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있다. 그런데 파리지앵이 더 자부심을 갖는 국제기구는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다. 세계 문화수도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UNESCO의 가운데 글자 ESC는 교육, 과학, 문화를 뜻한다. 파리는 관광문화도시 정도가 아니라 교육, 과학, 문화의 중심이다.

파리에는 12세기에 설립된 파리대학이 있다. 소르본, 팡테옹-소르본 등은 파리대학을 전신으로 갈라져나온 대학이다. 대학이 밀집한 카르티에라탱(라틴지구)은 지성의 거리다. 노벨상 수상자 14명, 필즈상 수상자 10명을 배출한 엘리트학교 고등사범학교도 파리에 있다. 한 해 입학생은 250명이지만 1인당 노벨상 수상지수로 환산하면 세계 1위다. 파리는 교육도시다. 인근 생제르망데프레 지역은 프랑스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카페와 부티크가 모여 있다. 프랑스의 첫 카페는 1644년 마르세유에서 탄생했고 파리에 카페가 생긴 것은 17세기 말이다. 1686년 프란체스코 프로코피아가 희극극장 코미디프랑세스 근처에 '프로코프' 카페를 열었는데 330년 역사의 이 카페는 지금도 성업 중이다. 프랑스혁명 시기에는 달랑베르, 몽테스키외 등 지식인이 드나들었고 이후에는 예술가, 문인이 단골이었다. 1881년 문을 연 카페 드플로르와 근처 레 되마고 카페도 문화예술의 성지다. 사르트르와 드 보부아르가 매일 문학토론을 한 곳이며 카뮈, 헤밍웨이, 피카소 등 시대를 풍미한 문화예술인이 즐겨찾은 장소다. 이 구역은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손색이 없다. 또한 파리에는 파스퇴르연구소가 있고, 왕실 과학자에게 봉급을 준 첫 과학한림원 아카데미데시앙스도 있다. 이쯤되면 파리는 유네스코의 본부 소재지로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왜 하필 교육과 과학, 문화일까. 각기 다른 영역인데 같은 국제기구가 관장하는 이유가 뭘까.



유네스코 헌장에는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 생기므로 평화의 방벽을 세워야 할 곳도 인간의 마음이다.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해 인류의 지적, 도덕적 연대 위에 평화를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돼 있다. 세계 평화를 위해 인간의 마음과 지성의 영역인 교육, 과학, 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별개로 여기는 세 영역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고 인류의 지성은 교육적, 과학적, 문화적 관계 속에서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것이 유네스코 설립 취지다.

이 셋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고 역사발전의 긴 시간에 견고하게 사회를 떠받쳤다. 아날학파 역사학의 거장 페르낭 브로델은 인류사를 삼층구조의 바다에 비유했다. 바다 표면에는 끊임없이 찰랑대는 파도가 있고 밑에는 해류가 있고 더 밑에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심해의 물이 있다. 단기 사건으로 구성되는 미시역사는 파도 같은 것이고 물질생활, 경제주기로 나타나는 주기 변동사는 해류 같은 것이며 모든 세기에 걸쳐 있는 장기지속 사회구조사는 심해의 물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역사적 변화도 비슷한 구조다. 대부분 사람은 사건과 사고 등 미시적 변화에만 주목하지만 주기적 경기나 구조변화가 훨씬 본질적이다. 물결로 해류를 설명할 수 없고 해류로 심해를 설명할 수도 없다. 가령 뉴스를 장식하는 사건·사고, 신기술 개발 등은 파도고, 산업과 경제변화는 해류며, 심해 기저에 잔잔히 흐르면서 세상을 떠받치는 것은 교육, 과학, 문화다. 사회적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은 백년지대계, 자연과 세상을 탐구하는 과학은 세상을 밝혀온 지식, 그 성과를 나누고 즐기는 문화는 인류의 삶의 방식이다. 서로 연결된 이 셋은 인간 사회를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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