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쪽 이재용 공소장이 말하는 것[오동희의 思見]

머니투데이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 2020.09.2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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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공소장 전문이 공개돼 온 것은 잘못된 관행이다.”

지난 2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청와대 선거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한 공소장 공개를 거부하면서 한 말이다.

추 장관은 당시 “이런 잘못된 관행으로 ‘국민의 공개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침해되고, 형사 절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기본권이 침해되는 일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이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에 대한 자본시장법 등 위반혐의와 관련한 검찰의 133쪽 짜리 공소장이 한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이 부회장과 삼성을 ‘거악’으로 부르는 이들은 ‘국민의 알권리’가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이미 2년 가량의 수사를 모두 마치고 재판을 앞둔 상황에서 공소장이 지금 공개되지 않으면 국민의 알권리가 침해될까. 이번 공소장의 공개는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를 막기 위한 조치도 아니다.



추 장관의 당시 지적처럼 어차피 내달 22일이면 ‘공개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시작돼 그 과정에서 모두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법무부의 방침을 어기고 공소장이 미리 공개되면 누구에게 이로울까. 여론재판에선 공격하는 쪽이 유리하다. 재판 전에 공개된 공소장은 검찰 일방의 주장이지만, 재판에서 공소장이 공개되면 검찰의 주장에 피고인 측의 반박이 가능하다는 차이가 있다.

시민에게는 재판에 앞서 한쪽의 주장만을 듣고 그것을 믿느냐, 재판 과정에서 양쪽 얘기를 다 들어보고 어느 한쪽의 주장이 더 옳으냐를 스스로 판단하느냐의 큰 차이다.


더 큰 문제는 법정 안이 아닌 여론의 재판정에서 이미 이렇게 공개된 공소장에 의해 각인된 최초의 기억과 틀(프레임)은 쉽게 바꾸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서로 입증을 하는 다툼의 대상이 되어야 할 주장이 재판 전에 이미 사실로 둔갑하면 각인된 프레임에 갇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재판 전에 공소장을 일반에 공개해 얻을 수 있는 ‘유죄 추정의 각인 효과’다.

공개된 공소장을 기반으로 이미 일부 시민단체는 검찰의 주장을 사실로 보고 추가 고발에 나서겠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과거 여러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경영계가 이번 공소장 공개가 반기업·반재벌 정서를 등에 업은 정치적 행위라고 의심하는 이유다.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 공개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주장과 달리 법원의 심판을 받기 전에 ‘무죄추정의 원칙’과 ‘증거재판주의’는 이미 여론에 밀려 사라졌다. ‘여론의 법정’에선 이 공소장 공개로 검찰이 사실상 승리한 셈이다.

공소장에서처럼 글로벌 기업 삼성이 총수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분식회계와 주가조작을 하고, 워렌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에게 부정한 계약을 요구하는 행위를 했다면 아연실색할 일이다.

그런데 자세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직 재판에서 입증되지 않은 일부 불법적 행위(주가조작, 분식회계 등)와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라는 전제를 빼고 보면 기업의 일상적인 경영활동의 상당수가 공소장에 기재돼 있다.

삼성생명 주식 매매와 관련해 워렌 버핏을 급하게 만난 것처럼 기재된 그 행사는 미국 아이다호 선 밸리에서 개최되는 ‘앨런 & 코 미디어 컨퍼런스’로 이 부회장이 수년째 초청받아 참석하던 행사다. 합병 주총 전에 급히 간 게 아니라, 매년 그때 거기 있었다.

또 제일모직 패션사업 이관, 에버랜드의 레이크사이드 운영, 다양한 순환출자해소 방안 논의, 전자부문과 금융부문의 지분해소 과정, 국민연금 등 주주의 설득, 골드만삭스의 컨설팅, 상장추진 등은 ‘경영승계를 목적으로’라는 말만 빼면 죄라고 부르기 힘든 일상적인 경영활동의 부류에 속한다.

알권리를 명분으로 재판전 공소장 공개를 통한 장외 여론재판은 반칙이다. 무죄추정의 원칙 등 법의 근간을 무너뜨린다. 그 누구라도 유죄여부는 반드시 법정에서 가려야한다.

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오동희 산업1부 선임기자(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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