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아산 정주영 회장의 울산대 창학 정신이 새겨진 바위. /사진=양영권 기자
그때 이루지 못했던 배움에 대한 갈망이 여기에 배움의 주춧돌을 놓게 하였으니
젊은이들이여 이 배움의 터전에서 열심히 학문을 익혀 드높은 이상으로 꾸준히 정진하기 바랍니다.』
울산 남구에 있는 울산대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보이는 큰 바위에 세로로 이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울산대학교 설립자 고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학교를 세우며 했다는 말이다. 울산대는 이 말을 '창학 정신'으로 받들고 있다.
아산은 지금은 북녘땅인 강원 통천군 아산마을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나 농사를 지었다. 10대 후반에는 여러 차례 가출을 했으며, 네번째 집을 나왔을 때 인천 부두와 소사(지금의 부천)에서 '뼈가 으스러지게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이어 상경해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본관 신축 공사장에서 돌을 지고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막노동을 했다. 아산은 나중에도 고려대 얘기가 나오면 본관 건물을 자기가 지었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하계수련회에서 직원들과 씨름을 하고 있는 정주영. /사진=아산정주영닷컴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개발사업이 본격화되자 현대토건의 규모를 확대할 필요성을 느껴 1950년 1월에는 '현대건설'을 출범시켰다. 현대건설은 이후 고령교 공사 등으로 시련을 겪긴 했지만 '20세기 최대 역사'로 평가되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등을 통해 우리 건설 역사에 독보적인 존재로 성장한다.
직원들과 함께 차를 미는 정주영. /사진=아산정주영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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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지의 기업을 일군 뒤에도 그의 삶은 소박한 노동자의 삶 그 자체였다. 아산은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나 자신이 노동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고, 지금도 나 자신을 그저 꽤 부유한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나의 일생은 기능공, 근로자들과 함께 한 세월이다"라고 고백했다.
◇특권 의식 없었던 삶 = '부자가 아닌, 부유한 노동자'라는 생각은 그의 삶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 울산 현대중공업에 마련된 아산 기념관 전시실에는 그가 30년 동안 신은 구두가 전시돼 있다. 굽이 닳는 게 아까워 징을 박아 넣을 정도였다. 회사에는 매일 아침 6시30분이면 걸어서 출근을 했다. 평생 담배와 커피도 하지 않았다. "배도 부르지 않는 것을 왜 하느냐"라는 생각이었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장을 둘러보는 정주영(맨 오른쪽). /사진=아산정주영닷컴
1977년부터 10년간 전국경제인연합회장을 역임했지만 그는 '재벌'이라는 말을 끔찍히 싫어했다. "전체 기업인을 통틀어 아예 영리만을 추구하는 경제동물로 보는 시각이 못나 안타깝다"고도 했다.
아산기념관에서 정주영과 관련한 자료들을 보고 있는 외국인들. /사진=양영권 기자
아산의 정신은 그대로 현대가에 계승됐다. 낮이든 새벽이든 가리지 않고 생산 라인을 둘러보며 근로자들을 격려하는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현장경영'이 대표적이다. 잊을만하면 터져 나오는 '맷값 폭행', '땅콩회항' 등 국내 대기업 총수 일가의 그릇된 행태가 범현대가에서만큼은 없다는 점도 주목할만 하다.
정주영이 신던 구두. /사진=양영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