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일적인 기관 로스컷 패닉증시 부른다

머니투데이 김성호,구경민 기자 2011.08.23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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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진단-한국 증시 개조 프로젝트 'WHY&HOW' ① 로스컷]

#A증권사 '프랍 트레이더(Proprietary trader·고유자산 운용인력)'인 김모 과장은 최근 자신이 투자한 종목들을 모두 정리했다.

증시가 패닉상황에 몰리면서 더 이상 손실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회사 내부 규정상 로스컷(Loss Cut·손절매)을 하게되면 자칫 기본급만 받게 되는 '생계' 문제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프랍 트레이더가 손절매를 하면 자신은 물론, 해당 팀 전체가 6개월 동안 매매를 할 수 없도록 내부 규정을 두고 있어, 팀 전체를 위해서라도 보유종목을 모두 처분할 수밖에 없다. 주가가 과도하게 떨어져 조만간 반등할지 여부에 대한 판단은 중요치 않다.

효율적인 자산운용을 위해 마련한 로스컷 기준이 오히려 증시를 패닉으로 몰고 가는 부메랑이 되는 전형적인 구조이다.



◇증권사, 로스컷 기준 엄격히 적용…자문형랩 임의 손절하기도

이달 들어 국내 증시가 급락하는 과정에는 항상 기관들의 로스컷이 있었다.
유럽 재정위기, 미국 신용등급 강등 등 불안한 글로벌 정세로 주요 투자자인 외국인이 매도공세에 나서면서 증시가 하락하기 시작했고, 기관들은 투자종목들이 로스컷 기준에 걸리자 앞 다퉈 손절매에 나선 것이다.

결국, 기관들의 손절매로 증시가 속절없이 무너지자 개인들마저 투매에 동참하면서 코스피가 하루만에 100포인트 넘게 하락하는 등 그야말로 '패닉'이 반복되고 이다.


기관투자자 가운데 특히 가장 엄격한 로스컷 기준을 적용하는 곳은 증권사다. 고유계정 투자로 손실이 발생하게 되면 자칫 법인영업의 기준이 되는 영업용순자본비율(NCR)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증권사들은 내부 규정에 로스컷 기준을 명시해 두고 있으며, 대부분 투자종목의 주가가 15~20% 밑으로 하락하면 손절매 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증권사들은 국내 증시가 본격적으로 급락하기 시작한 이달 들어 4거래일을 제외하고 연일 순매도 하고 있다. 지난 19일 현재 증권사 순매도 규모는 6282억원에 달한다.

획일적인 기관 로스컷 패닉증시 부른다


고유계정 뿐만아니라 올 들어 국내증시의 주요 매수 주체로 부상한 자문형랩 역시 손절매 회오리의 핵심에 서 있다. 자문사 한 관계자는 "주가가 단기에 급락한 이 시점에 주식을 파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이지만, 증권사들이 자체 로스컷 기준을 적용해 임의로 손절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산운용사, 중소형펀드 로스컷 활발…시스템매매가 원인

증권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로스컷 기준을 두고 있는 자산운용사 역시 최근 급락장에서 여지없이 로스컷 물량을 쏟아내고 있다.
펀드투자자들 역시 단기수익률에 연연하는 경우가 많아 최근과 같이 증시가 급락하게 되면 수익률 관리 차원에서 보유종목을 처분할 수밖에 없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이달 들어 지난 18일까지 국내 주식형펀드에 1조7139억원(상장지수펀드 제외)이 순유입됐지만, 자산운용사는 3281억원을 순매수하는 데 그쳤다. 특히, 최근 증시가 급락하는 과정에서 매수보다는 매도를 확대하는 분위기다.

자산운용사 한 관계자는 "펀드규모가 1조원이 넘어가는 대형펀드는 손절매 를 하더라도 대안을 찾기가 쉽지 않다"며 "상대적으로 펀드규모가 작은 중소형펀드는 손절매 이후 다른 종목으로 갈아타기가 쉽기 때문에 수익률 관리 차원에서 특히 손절매가 활발히 이뤄지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시스템 매매도 로스컷의 주범이 되고 있다. 시스템 매매는 운용력의 주관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컴퓨터 시스템에 따라 자동으로 매매가 이뤄지도록 한 것으로, 지수를 추종하는 인덱스펀드에 주로 적용된다.
최근과 같이 증시 수급이 불안한 상황에서 시스템매매를 통해 물량이 일시에 쏟아지면 시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산운용사 한 관계자는 "국내 인덱스펀드 대부분이 시스템 매매를 통해 운용되고 있다"며 "프로그램이 대부분 비슷해 동시다발적으로 물량이 쏟아져 나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선진국, 로스컷 규정 없어…종목 밸류에이션에 집중

'로스컷'이 투자손실 확대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로 인식되고 있지만, 장기 투자를 주로 하는 외국 기관들은 대부분 별도의 로스컷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유지은 전 맥쿼리증권 상무는 "가치투자를 원칙으로 하는 템플턴 같은 기관들은 로스컷 규정이 없다"며 "대부분 종목에 장기투자를 하다 보니 주가가 일시적으로 급락한다고 해서 섣불리 손절매를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외국계운용사 한 관계자는 "연기금 등 장기투자 중심의 외국 기관들은 투자종목의 '가치'자체가 훼손되지 않는 한 로스컷은 맞지 않는 매매행태라고 판단해 대부분 규정을 없애는 추세"라고 덧붙였다

물론 증시가 과도하게 하락하는 상황에서 로스컷이 수익률 관리의 안전판 기능을 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장기투자를 통해 고객의 수익을 높이고, 기관자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해야 할 기관들마저 시장의 단기급락에 휩쓸려 과도한 손절매에 나설 경우 오히려 불필요하게 손실이 확대될 수 있다. 특히 최근 수년간 시장의 상하 변동폭이 극도로 확대된 상태에서는 로스컷 기준에 대해서도 재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자본시장실 연구위원은 "기관의 자금운용 또는 펀드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로스컷제도가 도입됐지만 이를 일률적으로 적용할 경우 자칫 시장의 변동성을 키우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황 연구위원은 "투자자의 위험 감내 능력, 투자기간 등을 고려해 로스컷 기준을 탄력적으로 적용할 필요가 있다"며 "특히, 장기투자를 목적으로 한 자금의 경우 로스컷 기준을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적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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