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연평도를 포격한 지 이틀이 지난 25일 오후 연평도 주민들이 계속된 불안감으로 배를 이용해 섬을 떠나고 있다. [연평도=뉴시스]
25일 인천에서 연평도로 가는 뱃길이 열렸다. 북한의 무차별 폭격 이틀만이다. 섬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주민들은 속속 빠져나갔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이향란(64·여)씨는 입을 다물었다.
마을 입구에는 2층 양옥집이 있었다. 인기척이 없었다. 모든 유리창이 깨졌고 자물쇠와 달린 문짝은 떨어져나갔다. 모기장은 찢겨졌고 형광등은 부서졌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방 안에는 빨래가 널려 있었다. 대낮인데도 으스스했다.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웃음소리가 끝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밟는 걸음마다 유리조각이었다.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재가 날아올랐다. 까맣게 불타버린 집들에서 아직 냄새가 났다. 지나가던 이가 말했다. “하늘 좀 보세요. 무서워서 살겠습니까.”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적막했다. 불에 타 끊긴 전깃줄이 전신주에 대롱대롱 매달려 위태로웠다.
섬에도 풀은 자랐다. 하지만 폭격은 어느 것도 성하게 하지 않았다. 영림수산 뒤 2층 양옥집 대문 옆에는 아담한 나무가 있었다. 흡사 바비큐처럼 통째로 까맣게 그슬렸다. 가지를 만지자 힘없이 부러졌다.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봤다. 그대로 검은 가루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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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집 텃밭에서 기르던 무며 고추도 바싹 말랐다. 만지면 과자처럼 부스러졌다. “저 작은 것들이 열기를 견딜 수 있었겠나. 쯧쯧, 여긴 다 폐허가 됐어. 이제 어떻게 살아….” 유류를 팔던 가게가 몽땅 타 버렸다는 김응석(34)씨는 말끝을 흐렸다.
마을 곳곳에는 대피소가 있었다. 연평 노인정 앞 대피소 앞의 컵라면 쓰레기가 폭격 당일의 상황을 보여줬다.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봤다. 계단을 내려가자 떨어진 문짝이 보였다. 안에는 얇은 담요 몇 장만 남아 있었다. 어디에서도 마을 주민들의 온기를 느낄 수 없었다. 죽은 마을이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서자 마을은 더 적막해졌다. 선착장으로 가던 주민이 외쳤다. “취재고 뭐고 다들 여기서 빨리 나가요. 이제 곧 오후 4시 넘어서 배가 뜰 거야. 그거 타고 나가야지. 북한이 또 언제 쏠지 알아.” 면사무소에서는 “인천으로 대피하실 주민들은 지금 선착장으로 가라”는 방송도 계속 흘러나왔다. 전기를 복구하는 KT 직원들은 말을 아꼈다. 얼마나 진행됐느냐 물었더니 “지금 일분일초가 급하니 말을 걸지 말아달라”는 숨가쁜 말이 돌아왔다.
“연평도에 사는 사람은 모두 애국자다. 우리가 연평도에 살기 때문에 북한군이 그동안 공격을 못한 것이다.” 연평도 어민회장 신승원(70)씨 는 폭격 사흘째인 이날 폐허가 된 마을 곳곳을 둘러보며 주민들을 다독였다. “나도 육지로 떠날 준비를 했다. 집은 무사하지만 언제 또 공격을 받을지 모른다”며 남아 있겠다고 결정한 주민들을 위로했다. 신씨는 손에서 휴대전화를 놓지 않았다. 육지로 떠난 어부들이 수시로 전화를 걸어 연평도 상황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연평도에서 꽃게잡이를 하는 김정희(45)씨는 “죽어도 연평도에서 죽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차량 두 대를 이용해 부두와 마을을 오가는 주민들을 실어 날랐다. 현장 취재를 온 기자들도 이씨의 차를 수시로 얻어 탔다. 김씨는 “언론에서 연평도의 상황을 그대로 전달해야 정부가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당부했다.
연평도=임주리·신진호·유길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