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육백이십오'로 읽는 젊은이들에게

머니투데이 홍찬선 부국장대우 겸 금융부장 2010.06.30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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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칼럼]조봉호 김만덕이 누구예요?

“김만덕 기념관이 어디 있나요? 어떻게 가면 되지요?”
“김만덕이요? 그 사람이 누군가요?”
“사라봉에 있다고 하던데…”
“사라봉도 잘 모르겠네요…”

지난주말 제주도에 간 김에 일부러 짬을 내서 김만덕 기념관을 찾아가려고 호텔과 식당 직원에게 물으니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난감해 하다가 일단 택시를 탔다. 다행이 택시 운전사는 알고 있었다. 기사는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김만덕 기념관은 잘 모를 것이고요, 모충사라고 하면 알았을텐데…”라고.



1795년, 전 재산을 털어 쌀 450석을 육지에서 사와 4년 동안 계속된 흉년으로 굶주린 제주도민 수백 명을 구해낸 사람, 그 공덕이 정조에게 보고돼 내의원의 의녀반수라는 벼슬이 내려지고 사상 처음으로 여자로서 제주도를 떠나 금강산 유람을 한 사람, 게다가 올들어 KBS에서 “거상 김만덕”이란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는 사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모충사(慕忠祠)에 도착해서야 풀렸다. ‘나라에 충성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사당’이란 뜻의 모충사는 독립운동을 한 조봉호 열사와 구한말 의병활동을 한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1977년에 만든 사당이다. 김만덕관(기념관)도 모충사 한곳을 차지하고 있다.



저녁 7시가 넘었고, 비가 내리려는 듯 잔뜩 찌푸린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충사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김만덕 묘비’와 ‘김만덕관’의 초라함에서 세상인심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제주도 모충사 경내에 있는 김만덕의 묘역제주도 모충사 경내에 있는 김만덕의 묘역


200년 가까이 된 묘비(김만덕은 1739년에 나서 1812년에 서거했다)가 퇴색한 것이야 세월의 무상함을 비껴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는 ‘제주시 건일동 710 가으니마루’에 있던 묘가 도로확장 때문에 모충사로 옮겨왔다는 안내문을 보니 쓸쓸함은 더했다.

전 재산을 내놓아 제주도민을 구휼한 그의 뜻은 남았을까?
영원한 안식처마저 후손의 편의를 위해 빼앗기는 수모,
아니, 그것마저도 그의 뜻이었을지 모르겠다는,
옳은 일, 정의는 역사에 이름 한줄 남기는 것으로 충분한 것일까.
안타까움에서 그예 합리화를 찾아내며 돌아선다.


그나마 그의 초라한 묘비 옆에 서있는 작은 비석이 위안을 준다.
‘은광연세(恩光衍世: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 ’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의 선행을 전해듣고 헌종6년(1840년)에 내렸다는 글이다. 당대의 천재로 이름을 날렸던 추사가 그를 앙모(仰慕)했으니 한때 기녀(妓女)였던 김만덕으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을 기리기 위해 쓴 편액 은광연세.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br>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을 기리기 위해 쓴 편액 은광연세.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요즘 누가 역사를 생각이나 합니까? 국사마저 선택과목으로 돌려놓았으니 나의 뿌리가 무엇이고, 정말 소중한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지요…”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운전기사가 하는 말은 비수가 된다. 떳떳하게 돈 벌어 멋있게 쓰는 ‘당당한 부자’가 많아지도록 노력한다고 하면서 정말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잊혀져가고 있는 역사를 되살리고 올바른 삶을, 떳떳한 생을 살고 있는 것일까.

“200년이 넘은 김만덕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지요. 불과 60년 전에 일어났던 동족상잔의 비극이었던 한국전쟁도 모르는데요. 요즘 젊은이들 6?25를 보고 육백이십오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니까요…”

김만덕의 나눔 정신을 배우고 상상력을 키우려고 했던 나의 사치스런 마음은 그 운전사의 말에 산산이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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