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테스]그린스펀의 항변, 그리고 한국은행

머니투데이 김석규 GS자산운용 대표이사 2010.06.29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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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테스]그린스펀의 항변, 그리고 한국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으로 상징되는 글로벌 금융위기는 아직 진행형이지만 그 원인과 대책에 대해서는 이미 무수히 많은 의견이 제시됐다.

그 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최근 그린스펀이 브루킹스연구소에서 발표한 '금융위기 The Crisis'다. 그린스펀은 잘 알려진 대로 2006년까지 FRB 의장을 맡으면서 무려 18년간 미국 금융정책을 좌지우지해온 인물이다. "역대 가장 위대한 중앙은행 총재"라는 칭송을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위기의 주범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던 이 거물은 2008년의 금융위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대부분 전문가와 마찬가지로 그린스펀 역시 서브프라임 모기지 확대와 이의 증권화를 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좀더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이머징경제의 소득 증가와 높은 저축률 그리고 이에 기반한 이자율의 장기적인 하락을 근원적인 배경으로 꼽았다. 지나치게 낮은 금리가 자산시장에 버블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부실한 신용평가와 금융시스템의 복잡성 증가가 적정한 위험평가를 저해함으로써 사태를 확산했다고 설명했다. 그 외에도 자본주의 시스템이 갖는 고유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주기적인 위기국면의 도래가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적시하면서 이를 완화하기 위한 대책으로 금융기관의 자기자본과 유동성 그리고 담보기준 강화를 제시했다.



하버드의 맨큐 교수는 그린스펀의 보고서를 금융위기와 관련한 가장 포괄적이고도 뛰어난 분석이라고 평가했다. 여기에 이의를 달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책의 역할에 대한 그린스펀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소 의심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재임시절에 있었던 지나친 금융완화정책이 금융위기를 초래했다는 세간의 비판은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린스펀은 보고서에서 자신과 FRB를 향한 비판에 대해 각종 사실적 자료와 함께 반박논리를 제시했다.

특히 주택시장과 정책금리 간에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는 점을 강조했는데 장·단기 금융시장의 분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2003년 경기회복 이후 상당기간 저금리기조가 지속된 것은 사실이며 이로 인해 창출됐을 과잉유동성을 생각해본다면 적어도 간접적인 의미에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국의 한 퇴임 관료와 관련한 논란에 굳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나라 금융정책 역시 유사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2009년 초 콜금리를 인하한 이후 1년반 동안 2%의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실물경제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물가가 심상치 않은 상황임에도 저금리를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책당국자들은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린스펀 역시 IT 버블 이후 경기침체에 대한 지나친 우려로 2000년대 중반에 저금리 연장의 오류를 범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정책은 후행했고, 그 결과는 과잉레버리지와 금융시장 붕괴로 나타났다. 정부부채 면에서 아직은 부담이 적은 한국이지만 공공과 민간을 합친 전체 레버리지 수준은 결코 낮지 않다. 단순한 물가불안의 문제를 넘어서 재무건전성 차원에서도 저금리 기조 시정이 시급한 것이다. 그린스펀의 정치한 분석은 자신을 방어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데 도움이 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피해자들에게는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동일한 실수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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