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안전제일' 공기업, 춤추게 하려면

머니투데이 성화용 시장총괄부장 2009.06.23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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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공공기관)의 의사결정 방식은 확실히 민간과 차이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다. 공기업이야 대개 망할 염려는 없는 곳이니까, 여기서 '안전'은 기업의 안전이 아니라 개인의 안전이다. 어떤 의사결정을 했을 경우 책잡힐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 시비가 생기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장 먼저 고민한다.

일종의 방어기제다. 결재 단계를 거치면서 방어벽은 한층 견고해진다. 공기업 밥을 오래 먹은 고참 간부들은 민간기업 임원들이 보면 깜짝 놀랄 정도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물론 그 '통찰'이라는 건 방어 논리에 관한 통찰이며, 보통 사람들은 생각하기 힘든 자기 허점을 발견해 내 스스로를 보호하는 기능적 통찰을 의미한다.



일례로 한 공기업이 해외사업을 검토 중이며, 사업 규모가 1억 달러쯤 된다고 치자. 검토 과정에서 공기업 실무진과 간부들은 상당한 공을 들여 이 프로젝트의 당위성, 합목적성, 수익성 등을 따져 보고서를 만들 것이다. 그러나 공기업의 생리상 이 모든 검토의 최종 초점은 ‘만약 문제가 될 경우’에 맞춰지게 된다.

이 사업을 검토해 나온 A안이 성공할 가능성은 80%, 성공했을 경우 얻게 되는 사업가치가 3억 달러라고 하면 단순 산출한 기대값은 2억4000만 달러다. 이에 비해 B안은 성공할 가능성이 90%, 성공시의 사업가치가 2억 달러라면 기대값은 1억8000만 달러에 불과하다.



여기서 공기업은 대개 B안을 선택하게 된다. 공기업의 최종 보고서는 A안의 위험성을 부각시켜 구석에 밀어놓거나 아예 A안 자체를 숨겨버릴 가능성이 높다. 수익과 효율이 아니라 실패할 가능성을 먼저 보는 것이다. 다른 변수들을 고려치 않은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지만 이게 우리나라 공기업의 현실을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렇게 '안전 지향'의 속성이 자리 잡은 것은 전적으로 시스템의 문제다. 사업의 사후결과를 놓고 감사원이 평가하고 국회가 따진다. 절차의 정당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칼로 자르듯 명확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가.

공기업 사람들은 '완벽한 변명'이 불가능하다면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게 낫다고 여긴다. 수십년 동안 반복해서 당해왔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체득한 생존 방식을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가뭄에 콩 나듯 튀는 사람들이 튀는 의사결정을 한 적도 있지만 그 끝이 좋은 적은 거의 없었다. 이쯤 되면 공기업의 비효율을 일방적으로 비난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정부는 공공기관장 92명에 대한 경영평가에서 부실 경영의 책임을 물어 4개 기관장을 해임 건의했다. 또 성과가 부진한 17명을 경고 조치했다. 과거 25년간의 공공기관 경영평가 역사상 해임 건의 사례는 단 1건에 불과했다. 정부의 공기업 개혁 의지는 어느 때보다 강한 듯하다.

그러나 효율을 높이라고 하면서 시행착오는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규율 시스템, 아무리 좋은 성과를 내도 제대로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획일적 보상 시스템으로는 공기업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효율적인 직무 완수를 통해 얻는 것에 비해 뭔가 어그러졌을 때 감수해야 할 피해가 훨씬 크다면 굳이 움직일 이유가 없다. 중간쯤, 때로 그보다 살짝 아래 쪽의 성적이라도 버틸 수만 있다면 버티는 게 최선이다.

결국 공기업 사람들의 방어벽을 걷어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칼로 내리치면 벽이 조금 깎이는 듯 보이겠지만 결국 칼날만 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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