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3수' 이회창은 누구?

머니투데이 김은령 기자 2007.11.0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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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김영삼·김대중 등에 친필 경고서한 보낸 일화 유명

'대선 3수'를 선언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그의 이미지는 '대쪽'과 '차떼기 주역'으로 극명하게 엇갈린다. 이 전 총재는 30여년의 공직생활에서 소신있는 '대쪽 판사'란 별명을 얻었지만 2차례의 대선 도전 이후 불법 대선자금 모금과 아들 병역비리 의혹 등으로 오명을 쓰기도 했다.

이 전 총재는 1957년 사법고시 합격 이후 서울지법 판사를 거쳐 1981년 45세의 나이로 최연소 대법관이 됐다.



대법관 시절 박세경 변호사 계엄법위반사건,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 김기철 상임총무의 국가모독사건, 강신옥 변호사의 긴급조치위반사건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 10여건에 대해 소수의견을 내놓아 원칙주의자 이미지를 쌓았다.

이 전 총재의 이름이 대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8년 중앙선거관리위원장직을 맡으면서다. 그는 1989년 4월 동해시 보궐선거, 이듬해 영등포을 재선거 때 당선자를 포함, 후보자 모두를 고발했다. 당시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총재 등에게 친필 경고 서한을 보냈던 것도 유명한 일화다.



그는 김영삼 정부 들어 초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감사원장 시절 율곡사업, 평화의 댐에 대해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개입 여부를 묻는 서면 질의서를 보내 또한번 화제를 낳았다. 또 평화의 댐과 관련해 안기부(국가정보원 전신)를 조사하기도 했다. 이같은 '성역없는 감사'로 대중적인 인기가 절정에 달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6년 당시 신한국당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대쪽판사의 이미지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으며 정치 입문 1여년 만에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가 된다.

그러나 1997년 대선에서 아들의 병역 면제 의혹이 불거져 결정타를 맞은 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당시 표차이는 39만표에 불과했다.


이후 이 전 총재는 제1야당이었던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총재를 지내며 2000년 총선을 승리로 이끄는 등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지난 2002년 대선에 다시 도전장을 냈다. 그러나 병풍(병역면제 의혹)과 세풍(불법 대선 자금 모금 사건)에 대통령의 꿈은 또 다시 날아갔다.

이 전 총재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에 패한 이후 정계를 은퇴했다. 그리고 5년만에 대권에 도전장을 냈다.



△황해 서흥 출생(72세) △경기고 △서울대법대 △고등고시 사법과 합격 △서울지법 판사, 대법원 판사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 △국무총리 △15, 16대 국회의원 △한나라당 총재 △15, 16대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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