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위성복 회장의 40년 겸손

머니투데이 박종인 기자 2002.09.0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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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인이 만난 사람(3)

 `시골의 큰 집.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3대가 어울려 사는 대가족. 9남매중 여섯째. 형 셋에 누나 둘, 그리고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둘.'

 이 정도 위치면 숨바꼭질을 하다 헛간에서 잠든다 해도 한동안 방치되기 일쑤. 그러나 위성복 회장(62)은 달랐다. 약고 똑똑해 어려서부터 형제중 단연 돋보였다. 당연히 집안 어른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할아버지의 귀염을 독차지했는데…. 할아버지께서는 무조건적인 사랑 보단 평생 간직해야 할 교훈 하나를 남기셨다.



 "너는 재치가 넘치고 똑똑한 게 되레 흠이다. 재승덕박(才勝德薄)이란 말을 잊지 말아라."

 여섯살배기가 알아듣기엔 너무 어려운 주문이었지만….



 #겸손과 자중

 할아버지의 손자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자기 꾀에 빠져 대학 졸업을 놓칠 뻔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1964년2월. 위 회장이 군 제대후 서울대 상대에 복학해 졸업할 때의 얘기. 혁명 직후라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도 번듯한 직장 잡기가 쉽지 않았다. 공무원이나 한국전력 등 국영기업체, 은행 등을 빼면 마땅한 자리가 없던 시절. 위 회장은 복학후 열심히 공부한 덕에 졸업전 조흥은행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이나 하자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울을 떴는데….


 고향인 전남 장흥을 거쳐 순천에 있는 작은 형네 집에 가 있는데 고향집에서 급전이 날라왔다. 학점이 부족해 졸업이 힘들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급히 찾는다고 했다.

 `그럴 리가 있나, 졸업 학점에 맞춰 등록을 했고 전 과목에서 A학점을 받았는데….'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학교로 달려가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다. 졸업학점에서 1학점이 모자랐다. 수강신청을 할 때 1학점을 덜 신청한 것이다. 나름대로 졸업 이수학점에 딱 맞게 신청한다고 꾀를 냈으나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남들은 1~2학점 여유있게 신청했지만 위 회장은 `뭐 그럴 필요가 있느냐' 싶어 정확히 맞춰 신청한 게 화근이었다.
 
긴급 교수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성적이 문제가 아니라 계산착오인 만큼 추가시험을 보는 것으로 구제한다는 결정이 났다. 쉽지 않은처분이었는데 학점이 좋았던 게 큰 덕이 됐다. 할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머리좋은 것만 믿고 약게 행동했다 큰 낭패에 봉착한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위 회장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외삼촌으로부터 `겸산'(謙山)이란 호를 얻었다. `매사에 겸손하고 산처럼 자중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데 40년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늘 가슴에 새겼다고 한다.

 #사랑



 1963년 서울역 광장. 대학 4학년이던 위 회장은 나이가 같아 친구처럼 지내던 당숙을 환송하려고 서울역에 나갔는데…. 환송 일행중 숙명여대 배지를 단 여대생에 눈길이 자주 갔다. 당숙 친구의 여동생이라고 했다. 첫눈에 반한 남녀는 5년간의 열애끝에 결혼식을 올렸다.

위 회장의 본가는 장흥의 명문.(위 회장이 태어나 유년을 보낸 생가는 전남도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돼 있다)
 연애를 결혼으로 골인시키기까지 집안 어른의 승락을 받는게 쉽지 않았으나 위 회장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더 강했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기자, 아나운서, 교사, 사업 등 직장생활을 하면서 박봉의 은행원을 내조했다. 아쉬운 건 부인이 늘 일에 바쁘고 몸이 약해 금슬좋은 부부 사이가 1남으로 그쳤다는 것.

 "요즘 가장 큰 걱정은 아들놈입니다. 나이 서른을 넘긴지가 벌써 몇년전인데 아직도 일에 파묻혀 결혼은 뒷전입니다. 손자도 좀 보고 해야 겠는데…."



 위 회장의 아들 영오씨(33)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금융계(ABN암로)에서 일하는데 현재는 싱가포르와 홍콩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메모광

 1982년 조흥은행 싱가포르지점. 지점장으로 막 부임한 42세의 위 회장은 은행업무를 일일이 기록으로 남겨야 겠다고 결심한다. 당시 싱가포르의 경제상황이 좋지않아 거래 업체들이 줄줄이 부도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메모노트는 20년이 지난 지금 120권으로 불어났다. 1년에 6권씩, 그러니까 2달에 1권꼴로 늘어난 셈이다.

 어느 문방구에서건 1000원짜리 한두장이면 구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스프링노트, 위 회장의 메모노트에는 상사나 부하 직원에 대한 불만에서부터 대출청탁, 그날그날 만난 거래 업체 관계자의 신상과 그들과 나눈 대화 내용에 이르기까지 은행일과 관련된 모든 역사가 빼곡히 담겨 있었다.

 그런데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보여준 지난 어느 시절의 노트 한 권을 펼치니 신문기사 스크랩, 꼭 외워야 할 영어단어, 읽던 책에서 발췌한 좋은 글귀 등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단서도 가득했다. 조흥은행장으로 일하면서 추진했던 3년간의 구조조정에 대한 메모노트는 이미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기자는 나머지 노트에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120권을 하나씩 풀어 머니투데이에 연재도 하고 책으로 묶으시면 어떻겠습니까"하고 물었는데….

 "안 그래도 눈독들이는 언론사와 기자들이 많아요. 벌써 몇 명이 의사타진을 해왔는데, 현직에 있을 때는 풀어놓기가 곤란합니다. 은퇴한 이후에는 몰라도…."

 #천우신조



 2001년 9월11일(미국시간) 오전 8시45분 뉴욕. 당시 조흥은행장으로 있던 위 회장은 기업설명회(IR)를 위해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향하는 승용차에 타고 있었다. 그 때 멀리서 `쿵'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뉴욕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뉴욕의 중심가를 단숨에 날려버린 9.11테러가 터진 것이다.

 "아찔 했습니다. 만약 약속이 늦춰지지 않았다면 그날 저는 죽었을 겁니다. 하늘이 도운거죠. 그날 이후 모든 욕심을 버렸습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살기로 했죠."

 세계무역센터 빌딩에서 9시에 만나기로 했던 당초 일정이 상대편의 사정으로 30분간 연기되는 바람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30분 먼저 출발했다면 테러가 발생한 시점에 위 회장은 빌딩 안에 있었을테니 말이다.



 #꿈

 1964년. 조흥은행에서 인생의 첫 발을 내딛던 `25세 위성복'의 꿈은 `은행장'이었다. 매일 아침 거울속 자신을 보며 `위행장'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 꿈은 이미 이뤘다. 그럼 2002년 `62세 위성복'의 꿈은?

 "그동안 은행과 사회로부터 받은 것들을 하나씩 반납해야죠. 그래서 지주회사를 만드는 일 외에 강연과 저술 등에도 힘쏟고 있습니다.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건 아무리 나이가 들었다 하더라도, 예컨대 아흔살 아니 백살이 되더라도 노력을 하면 인생은 조금씩 개선된다는 사실입니다."
 (약력)
△39년 전남 장흥 출생 △광주고(58년) 서울대 상대(64년) 졸업 △64년 조흥은행 입행 △84년 영업3부장 △87년 샌프란시스코 지점장 △92년 이사 △94년 상무이사 △98년 전무이사 △98년 은행장 △98년 상임고문 △2001년 은행장 △2002년3월~ 이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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