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요리사 l 요리에 '정치' 드레싱을 끼얹다

머니투데이 신윤재(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4.09.19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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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넷플릭스사진=넷플릭스


요리는 대한민국 방송이 좋아하는 소재에다 지금껏 많은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졌지만, 유독 넷플릭스와의 인연은 없었다. 분명 많은 기획안이 넷플릭스에 들어갔을 가능성은 높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문턱을 분명 넘지 못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는 요리 콘텐츠가 어느 순간 장사나 지역경제, 급식 등 사회적 의미를 찾는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맛’ 본연의 매력을 찾는 기획이 분명 줄어들었을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넷플릭스가 대한민국 오리지널 예능을 만든 지 7년 만에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론칭했다. 물론 요리연구가 백종원이 등장하는 ‘백스피릿’이 2021년 공개되긴 했다. 하지만 이는 술을 매개로 백종원이 각개의 유명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토크 프로그램에 더욱 가까웠다. ‘과연 넷플릭스가 한국에서 요리 프로그램을 하면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가장 떠오르는 규모와 분위기 ‘요리계급전쟁:흑백요리사(이하 흑백요리사)’는 그 그림을 가장 적확하게 보여준다.



지난 추석연휴인 17일 공개된 ‘흑백요리사’는 약 한 시간 분량의 시리즈 12편이 모여 한 시즌을 이루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자신만의 요리를 선보이고 있는 ‘무명요리사’들을 ‘흑수저’로 상정하고, 미슐랭 스타나 각종 요리대회 우승 트로피로 자신을 증명한 ‘유명요리사’들을 ‘백수저’로 상정해 이들의 요리를 통한 계급전쟁을 풀어낸다.

사진=넷플릭스사진=넷플릭스


원래 이 기획은 ‘무명요리사’라는 제목으로 시작됐다. ‘히든싱어’ 시리즈, ‘싱어게인’ 시리즈 등으로 서바이벌에 익숙하고 ‘슈가맨’ ‘효리네민박’ 시리즈 등으로 감성을 가진 리얼리티를 주로 연출하던 김학민 감독은 이렇게 무명이지만 실력이 있는 ‘우리동네 요리사’들이 계급장을 떼고 맞붙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하지만 단순히 유명하지 않은 요리사가 모여 유명한 요리사를 만드는 서사는 숱한 다른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도 존재했던 형식이었다. 넷플릭스 역시 그러한 일반적인 기획에 자신들의 첫 번째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타이틀을 내어주고 싶지 않아 하는 듯 보였다. 김PD는 그래서 요리에 ‘정치’의 코드를 끼얹는다. 계급을 만들고, 이들이 이 안에서 작동하게 만들고 요리로 토론하게끔 한다.

초반이 공개된 ‘흑백요리사’는 놀라운 몰입도를 보여준다. 일단 80명의 개성이 강한 ‘흑수저’ 요리사들도 그렇지만 1회 중반부 이들을 마치 비웃듯이 핀조명을 받고 등장하는 20명의 유명요리사들의 존재가 시청자들의 눈길을 끈다. 이들의 면면은 스타셰프 최현석과 중식 그랜드 마스터 여경래, 한국 최초 여성 중식 스타 셰프 정지선, ‘마스터 셰프 코리아 2’ 우승자 최강록, 15년 연속 이탈리아 미슐랭 1스타 오너 셰프 파브리, ‘한식대첩 2’ 우승자 이영숙, ‘2010 아이언 셰프’ 우승자 에드워드 리 등 심사위원을 해도 적합할 이름들이 들어갔다.


사진=넷플릭스사진=넷플릭스
계급은 ‘흑백요리사’의 승부 원천이다. 이전 요리 서바이벌이 단순히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모두가 경쟁을 벌이는 단순한 서바이벌이 골자였다면 ‘흑백요리사’는 여기에 계급이라는 정치논리를 집어넣는다. 이들의 위치도 위, 아래이고 셰프복도 흰색과 검은색이다. ‘흑수저’ 셰프로 하여금 도전의식을 고취해 ‘저기 백수저 셰프를 잡아보리라’는 동기를 부여하고 ‘백수저’ 셰프에게는 도전에 맞서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증명하는 과정과 자신이 아직 열정이 살아있는 요리인임을 자각하는 시간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들의 모든 요리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으로는 다양한 요리 프로그램을 통해 ‘국민 요리멘토’로 올라선 요리연구가 백종원과 대한민국 유일의 미슐랭 3스타 셰프인 안성재 셰프가 등장한다. 보통 의견이 부딪칠 때를 대비해 홀수로 구성하는 심사위원 구성과 달리 ‘흑백요리사’는 두 명의 심사위원이 심사한다. 당연히 일치될 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럴 때 두 사람은 각자 자신이 미는 요리를 놓고 상대와 치열하게 토론한다. 토론을 통해 결론을 도출하는 행위 역시 고도의 ‘정치’ 행위다.

그리고 오는 24일 공개되는 3라운드 미션에서 이들은 팀전에 들어간다. 이때도 서로의 자존심과 요리인으로서의 성향, 특기 등을 서로 조화시켜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다. 서로의 다른 의견, 다양한 이권을 통제하고 조율하는 과정 역시 정치 행위다. 이렇듯 ‘흑백요리사’는 요리의 기본 위에서 계급, 토론, 조율 등 정치 행위가 오가는 독특한 서바이벌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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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000여 벌이 넘는 조리도구들과 각자가 준비해오는 첨단의 요리기구, 신선한 재료 등은 눈요깃감이 돼준다. 그리고 1000평의 스튜디오에서 40명의 요리사들이 동시에 조리에 들어가는 규모의 스펙터클 그리고 그것을 위해 스튜디오 안에 상하수도, 환기, 가스, 전기 등의 시설을 완비한 구성의 묘미 역시 들어가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흑백요리사’가 지금까지의 요리 서바이벌과 다른 것은 무명요리사 100인의 경쟁을 그 안에 20명을 유명요리사로 바꿔 계급 전쟁을 유도하고, 나눠진 계급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뺏기 위한 더 치열한 경쟁을 유도한 일이었다. 물론 요리에 대한 신념도 있겠지만 인간은 자신에게 구획이 지어지고, 무언가로 자신을 정의하는 말이 생겼을 때 이를 벗어나거나 아니면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헌신한다. 상위계층 역시 이를 사수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런 의미에서 ‘흑백요리사’는 고도의 정치 서바이벌로 명명할 수도 있다.

요리 자체의 재미를 갖고는 이미 너무 많은 프로그램이 스쳐 간 대한민국의 방송가, ‘흑백요리사’는 넷플릭스의 첫 요리 서바이벌로서 어떠한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까. 일단 정치를 끼얹은 요리. 마치 들기름으로 만든 아이스크림처럼 이질적인 요소의 조합이 실험적이다. 하지만 이 시너지에 따라 그 뒷맛을 꽤 오래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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