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구윤성 기자 = 10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한국디스플레이산업전(K-디스플레이2022)에서 참관객들이 참가업체 부스에 설치된 디스플레이를 살펴보고 있다. 2022.8.10/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근 대만의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는 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수출 금지 조치의 여파가 디스플레이 업계까지 확산될 가능성을 제기했다. 미국의 수출규제 범위가 더욱 확대될 것에 대비해 중국내 기업들이 대체 공급원을 찾는 플랜B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부 중국 기업들이 디스플레이 패널 제작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DDI등과 같은 핵심 부품 공급망의 다변화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이같은 움직임은 최근 중국이 반도체는 물론 첨단 디스플레이 산업에서도 글로벌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으로 보여진다. 옴디아에 따르면 중국은 올해 사상 처음으로 대형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출하량이 5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올해 대형 디스플레이 출하량 전망치는 55.2%로 집계됐다. 대만 24.9%, 한국 14.7%와 큰 격차다. 면적 기준 출하량에서도 중국의 점유율은 61.3%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기간 대만은 17.1%, 한국은 15.4%에 불과하다. 이처럼 중국 디스플레이 산업이 엄청난 성장을 거듭한 배경엔 중국정부의 천문학적인 보조금 지원이 자리한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간 징둥팡(BOE)와 화신광디엔(CSOT)가 정부에서 받은 적자 보조금은 각각 1조6000억원, 9200억원에 달한다.
예컨대 중국이 최근 국가 차원의 육성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OLED 분야만 해도 핵심 발광소재인 적색· 녹색 도판트의 경우 미국기업인 UDC(유니버셜디스플레이)가 독점하고 있다. 청색 도펀트의 경우 일본 기업들이 도펀트 시장을 100% 점유한 상태다. 증착기(알박, 캐논). 노광기(캐논, 니콘) 등 장비 역시 일본 기업이 사실상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포위망에 일본과 유럽 주요 국가들이 동참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중국의 OLED 굴기는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주저앉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디스플레이 산업으로까지 확산될 경우 우리 기업들에 미치는 파장도 만만치 않다. 삼성디스플레이의 경우 텐진과 동관에 OLED 모듈공장 2곳을 운영하고 있고 LG디스플레이 역시 중국 광저우와 난징, 옌타이 등에 생산공장을 갖고 있다. 반도체 사례를 반추해 보면, 첨단 디스플레이 제조 장비의 반입이 막히면 우리기업의 중국 사업에도 차질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시각 인기 뉴스
반면 80% 이상 글로벌 시장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는 국산 OLED의 경우 중국과의 기술격차를 벌일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실제로 삼성, LG 등 디스플레이 업체들은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으로 포트폴리오 재편에 나서고 있다. 최근 정부도 OLED 등 디스플레이 기술을 국가첨단전략기술 지정해 보호조치에 나섰다.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디스플레이 소재부품장장비의 국산화율 높이는 것이 디스플레이 업계의 숙제다. 이에 더해 투자세액공제 등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는 국가전략기술 지정도 필요하다는 디스플레이 업계의 요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뿐 아니라 디스플레이 역시 첨단 기술산업으로써 핵심적인 전략자산의 가치가 충분하다는 점을 미국과 중국의 갈등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서 "세계 각국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만큼, 국가전략기술 지정을 통해 초격차 기술력을 갖춘 디스플레이 산업의 위상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30년 공든탑 무너질라…韓디스플레이 골든타임 '1년' 남았다
큰 변화를 앞둔 가운데 국내 업계는 벌써부터 걱정이 앞선다. 중국 기업들이 자국 정부 보조금을 발판으로 한국의 아성을 넘보는데도 한국 정부의 대응이 느긋하기만 해서다. 자국 이익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미국이 우리 편에 설 것이란 보장도 없다. 디스플레이 기업의 한 임원은 "30년간 공들인 디스플레이 산업이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일 수 있다"라고 우려했다.
◇골든타임 1년…"기술 앞서도 밀릴 수 있다"
전문가·기관별로 차이가 존재하지만 한국은 OLED 시장에서 적게는 1~2년, 많게는 5년까지 중국과 기술격차를 벌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문제는 기술에서 앞서도 결과적으로 시장에서 밀릴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 기업이 정부 지원을 토대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다면 한국 기업에 남은 골든타임은 1년이 채 안 될 수도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충훈 유비리서치 대표는 "제품 경쟁력으로 기술도 있지만 가격도 있다"면서 "중국 업체가 성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가격 경쟁력이 좋은 제품을 대량으로 내놓는다면 시장 점유율을 빠른 속도로 늘려갈 수 있다. 일본 가전업체가 한국 기업에 밀렸던 이유가 가격 때문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미 우려는 현실이 되는 분위기다. 중국의 대규모 투자를 동반한 생산 확대가 빠르게 진행 중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중국 기업이 2024년까지 계획 중인 공장 신·증설은 23곳에 달한다. 올해 중국의 OLED 생산능력은 한국의 40% 수준으로 집계되지만, 중소형 OLED로 범위를 좁히면 90%까지 근접할 전망이다.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움직임도 관전 요소다. 미국은 디스플레이 산업에서 중국을 규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반도체 시장에서 벌어졌던 공급망 재편이 재현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은 OLED 소재 시장에서, 미국 우방인 일본은 장비 시장에서 시장 판도를 뒤바꿀 힘을 갖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IFA(인플레이션감축법) 시행에서 보듯 미국이 항상 한국에 우호적일 것이라 보는 것은 무리"라면서 "국내 기업들의 중국 내 공장 증설 혹은 공정 개선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디스플레이는 동관·톈진 공장에서 중소형 OLED 모듈 공장을, LG디스플레이는 광저우에 대형 OLED 생산 거점을 두고 있다.
◇수차례 위기 신호…다급한 업계, 느긋한 정부
서울 마곡 LG사이언스파크 LG디스플레이 OLED 쇼룸. 침대에 눕자 발 밑에서 투명 OLED 패널이 올라왔다. 이 투명 디스플레이를 활용해 날씨 등 정보를 습득할 수 있고 영화, 뮤직비디오 감상도 가능하다. /사진=머니투데이 포토DB
디스플레이업계 한 인사는 "국내 기업의 LCD 사업 철수, 중국의 매출 역전 등 여러 차례 위기 신호에도 정부의 반응은 미지근하다"면서 "한중 기술 패권, 공급망 경쟁이 과열되는 상황에서 시장 1위를 재탈환하기 위해선 정부 지원이 필수적이며, 정부의 투자 지원 없이는 XR, 전장 사업과 같은 새로운 기회 선점에서도 뒤쳐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상진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 상무는 "디스플레이는 소재와 장비 국산화율이 각각 60%, 70%로 타 산업 대비 높아 세제 혜택의 파급효과가 크다"면서 "혜택의 상당 부분이 대기업뿐 아니라 국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에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라고 전했다. 이 상무는 "국가전략기술에 지정되면 당장에 IT(정보통신)용 OLED 6세대, 9세대 추가 투자가 기대되는 상황"이라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