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진단 공짜 처방 한의원 있더라" 소문…김 경위 귀에도 꽂혔다

머니투데이 정세진 기자 2022.10.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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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김용훈 서울 중랑경찰서 수사과 지능팀 조사관(경위)

편집자주 한 번 걸리면 끝까지 간다. 한국에서 한 해 검거되는 범죄 사건은 113만건(2021년 기준). 사라진 범죄자를 잡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이 시대의 진정한 경찰 베테랑을 만났다.

김용훈 서울 중랑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장(경위). /사진=정세진 기자김용훈 서울 중랑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장(경위). /사진=정세진 기자


"경위님, 실손의료보험혜택을 활용해 공진단을 무료로 처방해주는 한의원이 있습니다."

김용훈 서울 중랑경찰서 수사과 지능팀 조사관(경위)은 2020년 5월 KB손해보험 조사관으로부터 한 건의 제보를 받았다. 공진단은 실손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보약임에도 한의원이 허위로 진료비영수증을 발행해 보험혜택을 받아 공짜로 먹을 수 있도록 하는 곳이 있다는 제보였다. 공진단은 원나라 때 명의 위역림이 황제에게 진상한 보약이다. 허준도 동의보감에서 '백병이 나지 않게 하는 최고의 보약처방'이라 소개했다. 사향, 녹용 등 고급 약재로 만든 탓에 30환(5g)에 180만원 이상을 호가하기도 한다. 사향의 질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KB손해보험 조사관은 직접 서울 서초구 A 한의원을 방문해 공진단을 처방받아 왔다. A 한의원이 발급한 통원확인서와 진료비영수증에는 '용내안심환'이란 약을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석 달 치 약값은 270만원. 2009년 이전에 실손의료보험에 가입한 경우 '용내안심환' 처방비용을 100% 지급받을 수 있다. 김 경위는 본격적으로 사건 조사를 시작했다.



한의사·보험설계사가 가담한 '브로커 조직'…피의자만 350여명
김용훈 서울 중랑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장(경위)/사진=정세진 기자 김용훈 서울 중랑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장(경위)/사진=정세진 기자
흔한 보험사기 사건으로 여길 수 있었지만 10년 차 형사 김 경위의 시선을 끄는 지점이 있었다. 소문 확인차 KB손해보험 조사관이 A 한의원을 방문했을 때 접수직원이 '어느분 소개로 왔냐'고 물어본 것. 규모가 큰 보험사기 사건이라고 의심한 김 경위는 금융감독원 협조를 받아 보험사별로 A 한의원 보험자료를 취합했다. 한의원에서는 통상 한달 치 약값이 30만원이 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90만원 이상 결제한 650여명을 추렸다. 다수 손해보험사가 이들에게 지급한 보험금만 16억여원에 달했다.

A한의원 원장 금융계좌를 압수수색하자 16억원 중 5억원가량이 의료광고업체 대표인 40대 남성 ㅁ씨 계좌로 넘어간 사실이 드러났다. 소개받은 환자의 결제액 중 30%를 '소개료'로 건넨 것이다. 현직 보험설계사인 ㅁ씨는 A한의원 원장에게 받은 5억여원을 '마케팅 인건비', '지하철 광고료' 등 명목으로 신고하며 세금도 냈다. ㅁ씨는 또 '본부장' 역할을 할 보험설계사들을 모집했다. 본부장 역할을 할 보험설계사 역시 자기 명의로 광고업체를 차렸다.



"공진단 공짜 처방 한의원 있더라" 소문…김 경위 귀에도 꽂혔다
본부장들은 카드 판매원, 보험모집원과 '프리랜서' 계약을 맺고 한의원 진료비를 보장받을 수 있는 보험 가입자를 모집했다. 한의원 원장이 지급한 5억여원은 ㅁ씨→본부장급 보험설계사→'프리랜서' 보험모집원·카드 판매원 등에게 일정 비율을 '소개 수수료' 명목으로 떼고 지급됐다.ㅁ씨와 한의원 실손보험 사기에 가담한 본부장급 보험설계사는 10여명, 프리랜서 보험모집원은 30여명이었다. 이들은 300여명의 실손보험가입자를 한의원에 소개해 준 대가로 돈을 받는 다단계 조직 형태로 범죄를 저질렀다.

경찰은 A 한의원을 압수수색해 공진단을 처방한 고객을 정리해 놓은 별도 장부를 발견했다. 장부에는 방문 환자 이름 옆에 네자리 숫자가 적혀 있었다. 조사결과 본부장의 휴대폰번호 끝자리였다. 보험모집원이나 카드판매원이 실손보험 가입자를 A한의원에 소개하면서 자신의 본부장 휴대폰 번호 끝자리를 알려주면, 보험가입자는 이를 한의원 접수 시 상담실장에게 전달했다. 이 '본부장별 코드'는 ㅁ씨가 실적별로 본부장들에게 '페이백'을 지급할 때 근거가 됐다.

지난해 6월 김 경위는 1년간의 수사 끝에 한의원 원장과 부원장, 상담실장 2명, ㅁ씨를 보험사기특별법 위반 및 의료법 위반으로 송치 했다. 송치할 때 검찰에 넘긴 수사자료만 10여만 페이지, 1톤(T) 트 한대 분량이었다. 이들 일당은 1심에서 모두 징역형 판결을 받았다.


보험사가 지급한 돈은 내돈?…"보험사기 피해자는 전국민"
김용훈 서울 중랑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장(경위)./사진=정세진 기자 김용훈 서울 중랑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장(경위)./사진=정세진 기자
보험업계에서는 김 경위가 수사한 한의사들과 브로커 조직이 유죄판결을 받은 게 이례적이라고 평가한다. 상당수 보험사기 범죄가 의료분쟁으로 이어지는 탓에 유죄판결을 받기 쉽지 않다. 김 경위의 수사로 의료인과 병원 직원, 브로커 조직이 가담한 실손보험 사기 수법이 드러나면서 서울경찰청 금융범죄수사대가 서울 강남의 모 안과와 브로커 사무실 등 7곳에 대해 압수수색에 착수하는 데 도움을 줬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병원과 브로커 간 관계를 밝혀낸 덕분이다.

2020년에는 서울 중랑구에서 한의사 B씨가 한의원 옆에 정형외과를 차린 뒤 한의원 처방 내역을 정형외과에서 진료받은 것으로 속여 실손보험료를 지급받은 사건을 수사했다. B씨는 브로커를 고용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한약을 처방하고 정형외과에서 진료받은 것처럼 속여 보험금을 지급받도록 했다. B씨를 구속기소 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 경위는 경찰청장 표창을 받고 특진했다.

김 경위는 "보험사기는 전 국민을 피해자로 만드는 범죄"라고 말한다. 그는 "백내장 수술이 실손보험 사기에 이용된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관련 혜택이 줄고 있다. 실손보험도 세대가 지날수록 혜택이 줄고 자기부담금도 높아지고 있다"며 "보험사기 피의자들은 내가 보험사에 낸 돈을 내가 타 쓰는 거라 문제없다는 인식이 큰데 사실상 보험에 가입한 전 국민이 높아진 보험료 부담을 나눠지는 꼴"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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