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위대했던 배우 故 강수연의 빛나는 55년

머니투데이 김형석(영화 평론가) ize 기자 2022.05.09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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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지지 않은 황망한 부고에 영화계는 큰 슬픔

고 강수연, 사진제공=스타뉴스DB고 강수연, 사진제공=스타뉴스DB


인터뷰이로 만나든, 사석에서 대하든, 강수연은 항상 여유롭고 자신 있고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그 느낌은 인생의 대부분을 배우로 살았던 사람의 내공이었고, 어느덧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 된 자로서 지니는 품격이었다. 그가 55년의 짧은 삶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너무 갑작스럽고 믿어지지 않는다.

강수연은 한국영화사에서 영원히 기록될 이름이다. 한국영화가 깊은 침체로 접어들던 1980년대, 베니스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1987)로 은사자상(여자배우상)을 수상한 그는 이후 ‘월드 스타’라는 수식어를 가지게 되었고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다시 한 번 여자배우상의 주인공이 된다. 한국영화가 외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강수연은 국제영화제에서 통용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었다. 최근 등장한 ‘K-무비’라는 이름의 근원을 살펴 올라가다 보면 우린 그의 존재감과 조우하게 된다.



강수연에게 연기는 삶이었다.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서너 살이 되었을 때부터(1969년) 카메라 앞에 섰다. 기본적인 의사 표현이 가능했을 때부터 ‘연기’라는 걸 했던 셈인데, 요즘과 달리 아역배우가 드물었던 시절에 충무로에서 강수연은 바쁠 수밖에 없었고, 초등학교 시절부터 촬영장이 그의 학교였다. 과거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일요일에 쉬었던 게 딱 두 번”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당시 강수연의 일상이 어땠는지 가늠할 수 있을 듯.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이미 강수연은 영화와 TV 드라마를 오가며 베테랑의 커리어를 가진 셈이다.

'별 3형제'(1977) '비둘기의 합창'(1978) '어딘가에 엄마가'(1978) '하늘나라에서 온 편지'(1978) 등 꿋꿋이 살아가는 어린이를 주로 맡았던 아역 시절을 거친 그는 10대에 접어들며 TV 드라마 '고교생 일기'(1983)로 하이틴 스타로서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경력 초반을 차지하는 1970~80년대 한국영화의 기후는 좋지 않았다. 성인 연기자로 거듭나야 하던 시절, 충무로는 에로티시즘이 장악하고 있었다.



여기서 강수연은 현명한 길을 걷는다. 당대의 트렌드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스펙트럼을 위해 노력한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시작한 연기였지만, “평생에 승부를 걸 직업으로 후회 없이 죽도록 열심히 하자는 결심”을 했던 것이 10대 후반의 일이었고, 강수연의 ‘스물 즈음’은 결심의 확고한 실천이었다.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 2'(1985)와 이규형 감독의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는 청춘 스타로서 이미지를 확고히 드러낸 작품이라면, '연산군'(1987)에선 섹슈얼한 매력을 발산했다.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 준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에선 거칠게 살아가는 창녀였다. '감자'(1987)에선 생활력 강한 아낙이 되었고, '씨받이'에선 비극적 운명을 살게 되는 대리모 옥녀로 등장했다. 특히 '씨받이'는 한국영화에 한 동안 맥이 끊겼던 대형 여배우의 계보가 되살아났음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당시 스무 살 밖엔 되지 않았지만, 임권택 감독은 옥녀가 겪은 엄청난 체험의 세계를 표현할 만한 기량을 지닌 배우는 강수연뿐이라 생각했다고 하는데, 강수연은 감독의 선택 이상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사진제공=故강수연배우장례위원회사진제공=故강수연배우장례위원회
1990년대 한국영화는 조금씩 침체에서 벗어나고 있었고, 젊은 감독들의 새로운 시도가 이어졌다. 이 시기 강수연은 기꺼이 그들의 뮤즈가 되어 주었다. 그는 단지 아역 시절부터 오래 연기한 배우가 아니라, 특유의 강단과 ‘끼’로 작품마다 변신했던 연기자였다. 박광수, 장선우, 이현승 등의 이른바 ‘코리안 뉴시네마’ 감독들과 '베를린 리포트'(1991)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등에서 만났고, '그 여자, 그 남자'(1993)에선 당대의 트렌드였던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후로도 오랫동안'(1989)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90) '깊은 슬픔'(1997) 그리고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1996) 등에선 멜로 연기의 맥을 이었다. 1991년엔 해외로 진출해 대만 영화 '낙산풍'에 출연하기도 했다.


특히 이 시기 그의 캐릭터는 페미니스트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그대 안의 블루'는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와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그가 사회의 변화와 흐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던 연기자였다는 걸 보여준다. 이처럼 1980~90년대 강수연이 보여준 캐릭터는 과거 선배들이 극복하지 못했던 ‘여배우의 전형성’을 뛰어넘어, 그 다양성과 과감성에서 확실한 차별점을 지녔다. 이것은 그가 후배 여배우들에게 끼친 가장 큰 영향이자, ‘배우 강수연’의 중요한 성취였다.

1990년대 수많은 출연 제의를 받던 시기, 그는 오히려 출연작을 줄여나갔다. 영화를 평생 해야 하는데 자신을 지나치게 소모할 순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2000년대엔 오랜만에 브라운관으로 돌아가 '여인천하'(2001) '문희'(2007)에 출연했다. 이후 '달빛 길어올리기'(2010)에서 오랜만에 임권택 감독과 재회했고, 한 동안 부산국제영화제의 집행위원장으로서 대외적 활동을 했다. 그리고 2022년 연상호 감독의 SF '정이'로 오랜만에 영화에 출연하였으나, 아쉽게도 이 영화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에서 강수연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하며 온 건 아니지만,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꿈이 있어요. 내가 정말 70살 이렇게 되었을 때, 예를 들면 '집으로…' 같은 영화에서 관객들에게 사랑 받고 연기도 잘하는, 그런 할머니 배우가 되는 게 제 꿈이죠.” 평생 배우의 꿈을 지녔던 배우 강수연. 그러나 이젠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이제 그는 영화 속 이미지만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새삼 슬프고 안타깝다. 부디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다시 한 번 위대한 배우였던 당신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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