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눈엣가시 '이란 영웅'…그가 죽자 전세계가 전쟁공포

머니투데이 김성은 기자 2020.01.11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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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人세계IN]거셈 솔레이마니 이란 IRGC 쿠드스군 총사령관 죽음 후 1주일, 美-이란 긴장감 '최고조'

/사진=AFP/사진=AFP


거셈 솔레이마니 이란혁명수비대(IRGC) 쿠드스군 총사령관(사진)이 지난 3일 새벽 이라크 바그다드 공항에서 미군 공습을 받고 사망한 이후 전세계가 전쟁 발발 공포에 떨고 있다. 지난 8일 이란의 이라크 내 미군 기지 미사일 공격으로 긴장이 고조됐으나 미국이 사상자 없음을 확인한 뒤 무력 보복에 나서지 않기로 하자 긴장감은 다소 완화됐다. 그러나 이란 최고지도자가 미사일 공격은 겨우 "미국의 뺨을 한 대 때린 것"이라 말하는 등 불씨는 언제든 타오를 수 있는 상황이다.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공작원" vs "살아있는 순교자"
지난 6일 이란 테헤란에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군중/사진=AFP지난 6일 이란 테헤란에 솔레이마니 사령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군중/사진=AFP


이번 사건 발생전까지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이었을 수 있지만 이란 사회나 미 정보당국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유명 인사이자 요주 인물이었다.

중동에서 벌어진 분쟁을 오랜 시간 취재해온 미국 저널리스트 덱스트 필킨스는 2013년 '더 뉴요커' 기고를 통해 그에 대해 '그림자 사령관(The shadow commander)'이라 평가했고 전직 CIA 요원은 '오늘날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공작원'이라고 불렀다.



수일간 치러진 애도·장례 기간 동안 모인 수많은 인파에서 알 수 있듯 이란 사회가 그에 대해 갖는 애정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이란의 적들과 싸운 사심없는 영웅"이라고 말했다. 매릴랜드 공공정책 대학의 2019년 10월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에 대한 이란인들의 호감도는 82%로 나타났다.

1957년 이란 남동부 케르만 지역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어린시절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샤 왕조가 무너진 뒤 생긴 이란 혁명수비대(IRGC)에 가입해 활동했다. 2020년 미군의 드론(무인기) 공격으로 눈감기 전까지 전장에서 삶을 보낸 군인이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을 때 솔레이마니 사령관은 조직력과 통솔력을 발휘해 빠르게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후 종파적으로 적대관계에 있던 이슬람국가(IS) 세력을 시리아, 이라크 등에서 몰아내는데도 기여했다. 이란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로부터 "살아있는 순교자"란 별칭을 얻었다.

뉴욕타임스에는 그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휘하 군인들을 전장으로 보내야 할 때는 한 명 한 명을 부둥켜 안고 열렬히 눈물 흘렸다는 장면도 묘사됐다. 진위를 알 수 없으나 전선에 나설때는 방탄조끼도 입지 않았다는 목격담도 나왔다.

이란 외 중동 여러 지역에서 반미 활동에 참여하고 레바논의 헤즈볼라 등을 대상으로 테러활동을 지원했단 이유로 미국엔 눈엣가시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는 2011년 주미 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암살 모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8년 7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사이에 대이란 제재 복원을 두고 설전이 오갔을 때 "도박꾼 트럼프를 우리 대통령이 직접 상대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 군인인 내가 나서겠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사방이 적이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루머'도 수차례 제기됐다. 2006년 비행기 충돌로 이란 북서부에서 숨졌다는 설, 2012년 시리아 다마스쿠스 폭발로 눈을 감았다는 설, 2015년 11월 시리아 한 전투에서 최소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는 이야기 등이 나왔다.


◇솔레이마니의 죽음으로 재차 주목받는 IRGC는
/사진=AFP/사진=AFP
이란에는 정규군 뿐 아니라 이슬람체제를 수호를 주 임무로 하는 IRGC가 군의 두 축을 담당하고 있다. 1979년 이슬람혁명 당시 최고 권력기관이던 이슬람최고혁명위원회가 새로 창설했다.

정규군이 40면 병력이라면 IRGC는 약 12만명~15만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20만명으로 보는 곳도 있다. IRGC는 육군, 해군, 공군은 물론 특수, 정보부대 등도 갖췄다.

솔레이마니 사령관이 이끌었던 쿠드스군은 IRGC 내에서도 특수전 및 해외 작전을 담당했던 최정예부대로 여겨졌고 이들은 이슬람 혁명을 전파하는 특별 임무를 띄고 주로 이란 외 지역에서 활동했다.

외세 간섭을 배격하기 때문에 IRGC의 주요 간부들은 '핵합의'를 체결하는 등 서방에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취해온 로하니 현 이란 대통령, 자바드 자리프 외교장관과는 한 때 보이지 않는 갈등을 빚기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최고실세 곁에 있는 만큼, IRGC의 간부진이 이란 내 경제에도 직간접적으로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40여년 애증의 역사…미·이란

9.11 테러당시 모습/사진=AFP9.11 테러당시 모습/사진=AFP
미국과 이란이 줄곧 마찰 관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정권이나 사안에 따라 긴장과 완화를 반복했고 때로는 손잡고 협업한 때도 있다.

이슬람 혁명 이후인 1979년 11월, 이란 내 강경 반미 성향 대학생 등이 주이란 미국 대사관을 덮쳐 당시 외교관 등 수 십 명을 인질로 삼았다.

이들의 요구는 미국에 신병 치료차 체류중이던 팔레비 전 국왕을 본국으로 송환하라는 것이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이 보복시 이란 내 52곳을 타격하겠다고 했는데 52란 숫자는 당시 1년 넘게 억류됐던 미국인 인질수를 뜻한다. 인질 사태로 인해 미국이 이란에 대해 자산동결 등 제재를 부과했고 미국과 이란 사이 외교관계는 사실상 단절됐다.

잠시 해빙기가 찾아온 때도 있었다. 1997년 취임한 모하마드 하타미 전 이란 대통령은 평화와 안정을 얻기 위해 미국과 대화의 뜻이 있음을 시사했고 당시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도 관계개선을 희망한단 뜻으로 화답했던 것.

2001년 9.11 테러 사태에서는 양국이 물밑에서 손잡기도 했다. 양국의 공동작업이 실제 알카에다 공작원 포착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테러를 주도했던 알카에다는 주로 극단주의 수니파로 이뤄지거나 이들의 후원을 받았는데 이란의 주류인 시아파와는 좋은 관계에 있지 않았다. 알카에다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IS(이슬람국가)도 이란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IRGC와 중동 곳곳에서 세력다툼을 벌였다.

해빙의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2002년 1월,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이란을 '악의 축'으로 지목하면서 양국은 다시 경색국면에 들어갔다. 2005년 이란에서도 강경파인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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