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노래방·흡연실된 아이들의 등굣길

머니투데이 이영민 기자 2019.12.23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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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분별한 집회로 고통받는 주민들…성숙한 집회 문화 필요

"너희는 한 번이지만 우리는 매일이다."

21일 시각장애인 학부모들이 현수막을 들었다. 청와대 앞 집회·시위 단체를 향한 외침이다. 이들은 무분별한 집회 소음으로 소리에 의존해 걷고 배우는 맹학교 학생들이 이동권과 학습권을 침해받는다고 호소했다.

두 달여 전부터 국립서울맹학교 아이들의 등굣길에 날마다 욕설과 노랫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맹학교에서 500m 떨어진 청와대 사랑채 옆 도로를 점거한 단체의 집회소음이다. 보수단체나 진보단체나 마찬가지다. 확성기와 대형 스피커를 동원한 자극적 연설과 합창은 밤낮으로 이어진다.



청운·효자동 주민에게 이런 불편은 일상이 된 지 오래다. 효자동 자하문로 대로변 인도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한 자영업자는 "대로에서 집회 행진이 있는 날에는 장사를 포기한다"며 "행진하던 사람들이 길가에서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가게 문 앞, 인도를 가득 메워서 사람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걸어가는 지경이 된다"고 하소연했다.

경찰은 내년 1월 4일부터 청와대 인근 주민 생활에 영향을 주는 곳에 집회를 금지하기로 했다. 이에 대해 벌써부터 이들은 스피커에 큰 소리를 담아 헌법21조 집회의 자유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집회의 자유는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 헌법에는 다른 가치들도 있다. 헌법 10조에는 행복을 추구할 권리도 있고, 17조에는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고, 제31조에는 교육 받을 권리도 있다. 34조에는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도 가진다. 핵심가치가 충돌할 때는 한 가치가 다른 가치를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이동하고 배울 권리, 시민이 거리에서 자유롭게 숨 쉴 권리마저 침해하는 ‘형태’의 집회의 자유는 존중받기 힘들다.

집회를 금지한다고 문제가 해결될지 알 순 없다. 이미 지난달 말부터 있었던 경찰의 제한통고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근본 해결책은 성숙한 집회·시위 문화다. 촛불시위, 침묵시위, 피켓팅 등 성숙한 시위로도 메시지를 또렷이 전달한 선례가 많다. '착하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 식의 막무가내 집회는 알아듣고 싶은 생각조차 사라지게 만들 뿐이다.

[기자수첩]노래방·흡연실된 아이들의 등굣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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