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사람 다 샀다" 전기차 인기 방전…K-배터리 '보릿고개' 탈출로는

머니투데이 안정준 기자, 최경민 기자, 박미리 기자, 이세연 기자 2024.05.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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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탈 캐즘 로드맵 (上)

편집자주 전기차 시장의 '캐즘'(Chasm, 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둔화기) 진입이 현실화했다. 완성차 업계의 생산 감축 후폭풍이 배터리 기업의 실적에 반영되기 시작했다. 대중화 문턱에서 전기차 시장이 주저앉으면, 미래 먹거리로 여겨 온 배터리의 밸류체인이 붕괴한다. '죽음의 골짜기'에 직면한 배터리 업계의 현실을 들여다 본다.

눈 앞에 펼쳐진 '죽음의 골짜기'…'55조원' 베팅 리스크 현실로
LG엔솔, 삼성SDI, SK온 영업이익 추이/그래픽=이지혜LG엔솔, 삼성SDI, SK온 영업이익 추이/그래픽=이지혜


LG에너지솔루션(LG엔솔)과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3사의 올해 1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932억원이다. 지난해 보다 86% 급감했다. 배터리 뿐만이 아니다. 배터리 용량과 출력 등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소재 양극재 생산기업인 에코프로비엠, LG화학(첨단소재부문), 포스코퓨처엠의 합산 영업이익 역시 1866억원으로 같은 기간 45.5% 줄었다. 배터리 전자의 이동 통로 역할을 하는 동박 제조를 담당한 SKC의 이차전지 소재 사업은 399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전년대비 적자폭이 커졌다. 양극과 음극을 나눠주는 분리막 제조사 SK아이이테크놀로지도 674억원의 영업손실을 내며 적자전환했다.

이같은 배터리 밸류체인의 실적 악화 요인은 전기차 캐즘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기차 구매 수요가 감소하면서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재고조정과 생산 조절에 나섰다. 전방 시장 사업환경 변화은 배터리 업계의 어닝쇼크로 이어졌다. 위기의 양상은 완성차와 다르다. 한 배터리업계 관계자는 "완성차 업계는 전기차 수요가 둔화해도 하이브리 자동차와 내연기관 자동차 등 포트폴리오가 있지만 배터리 밸류체인에 속한 기업들은 전기차 시장이 무너지면 대안이 없다"고 했다.



문제는 이제 막 시작된 캐즘 발 충격의 끝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3~4년 뒤를 예측하는 전문가가 있는 반면, 전기차 자체가 캐즘을 극복하지 못하고 내연기관차 만큼 대중화된 시장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비관론도 존재한다. A 배터리 소재사 대표는 "누군가 그 시기를 '안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LG엔솔, 삼성SDI, SK온 투자 추이/그래픽=이지혜LG엔솔, 삼성SDI, SK온 투자 추이/그래픽=이지혜
캐즘 기간이 길어지면 질수록 업계는 존립을 위협받는다. 배터리 관련 산업을 미래 먹거리로 삼겠다며 쏟아부은 투자 규모가 천문학적이기 때문이다. 지난 3년간 LG엔솔과 삼성SDI, SK온 등 배터리 3사가 설비와 연구개발 등에 집행한 자금만 45조원에 이른다. 양극재와 동박, 분리막 등 배터리 소재 투자까지 합하면 55조원에 육박한다. 전기차 시장의 지속적 성장에 대한 베팅이었지만 장기간 전기차가 팔리지 않으면 고스란히 재무 리스크가 된다. 적신호가 들어온 곳도 있다. SK이노베이션의 지난해 부채는 50조7592억원으로 3년 새 두배 이상 급증했다. 부진에 빠진 SK온 지원 때문이었다.



업계는 투자 속도를 조절하고 있다. SK온은 1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비우호적인 업황에 대응하고자 유럽과 중국의 설비 증설 시점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겠다"고 했다. LG엔솔은 올해 작년과 유사한 10조원 수준의 설비투자를 계획했지만 이를 재검토하고 있다. 양극재 업계도 일제히 "배터리 제조사 투자속도에 맞출 것"이라는 입장이다. 수요 부진에 빠진 전기차 배터리 대신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배터리 시장으로 눈을 돌리기도 한다. LG엔솔은 미국에 첫 ESS 배터리 전용 공장을 착공했고, 삼성SDI는 ESS 배터리 전담 조직을 신설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한계가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시간벌기용 대책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기차 수요가 되살아나지 못하면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김필수 대림대 자동차학과 교수는 "캐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전기차의 태생적 문제로 남아있는 충전시간과 주행거리를 개선할 기술이 최대한 빨리 나와야 하고 차량 가격도 내연기관차 수준으로 낮아져야 한다"며 "결국 원가와 R&D, 공정을 모두 잡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 만한 사람은 다 샀다…힘 빠진 전기차, 부활 지름길은?

소비자, 전기차 구매 원하지 않는 이유는/그래픽=윤선정소비자, 전기차 구매 원하지 않는 이유는/그래픽=윤선정
지난 1월, 영하 30도의 북극한파가 덮친 미국 시카고. 전 세계적으로 전기차 시장이 '캐즘(Chasm, 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둔화기)'에 진입한 원인이 상징적으로 나타났다. 혹독한 추위에 배터리가 닳은 전기차가 충전을 기다리던 중 완전 방전됐다. 도시 곳곳의 충전소에서 차주들이 버리고 떠난 차가 목격됐다. 현지 언론은 충전소를 '전기차의 무덤'이라고 표현했다.


날씨에 따라 널뛰는 배터리 성능, 긴 충전시간, 부족한 충전시설, 짧은 주행거리 등 전기차의 한계를 감수하고 구매한 '얼리어답터'의 시간은 갔다. 전체 소비자의 16% 비중을 차지하는 얼리어답터의 구매가 끝나면 판매가 둔화된다는 게 캐즘 이론이다. 지난해 글로벌 완성차 시장에서 전기차의 침투율은 16%였다. 살 만한 사람은 다 산 셈이다.

소비자들의 내연기관차 대비 전기차 선호도는 오히려 전년보다 떨어졌다. 한국 딜로이트 그룹의 '2024 글로벌 자동차 소비자 조사'에 따르면 올해 미국의 내연기관차 선호도는 67%로 전년보다 9%p(포인트) 뛰었다. 독일과 한국의 내연기관차 선호도는 각각 49%, 38%로 두 국가 모두 전년보다 4%p 상승했다. 그만큼 전기차 선호도가 내려갔단 뜻이다. 아예 구매를 원치 않는 소비자들의 비중도 높아졌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JD파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전기차 구매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비자 비중은 29.2%에서 4개월 연속 하락해 지난 2월 24.4%로 내려 앉았다. 구매를 원치 않는 이유로 '충전시설 부족', 긴 충전시간(45%), 짧은 주행거리(43%) 등을 들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미국과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국내 전기차 충전기 보급 대수 추이/그래픽=최헌정국내 전기차 충전기 보급 대수 추이/그래픽=최헌정
때문에 인프라와 기술 확보가 캐즘을 돌파할 첩경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호 한국자동차연구원 산업분석실장은 "연구개발을 통해 전기차와 배터리의 한계를 극복하고 단점을 줄여나가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충전 시설 부족 개선을 위한 노력은 현재 진행형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2022년 20만기 수준이던 전국 전기차 충전기를 지난해 약 30만기로 늘렸다. 올해 목표는 45만기이며 2030년까지 123만기를 확보하는 게 목표다. 현대차그룹은 전기차 초고속 충전 서비스 '이피트'를 내년까지 500기 구축하기로 했으며 SK와 GS는 전국 주유소 내 전기차 충전 서비스를 늘린다. 국내 충전기 1대당 전기차 대수도 지난해 기준 1.78대다. 세계 평균인 10대와 비교해도 충전 인프라 확대 속도는 빠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충전기의 절반 가량이 수도권에 집중된 현상을 해결하는 게 숙제"라고 말했다.

충전시간 단축과 주행거리 확장은 배터리와 충전기 기술과 생산 능력 도약이 수반돼야 한다. 기존 흑연 음극재보다 에너지 밀도를 대폭 끌어올린 실리콘 음극재 생산이 국내에서 가능해지며 이 같은 문제를 해소할 단초가 마련됐다.포스코홀딩스의 100% 자회사 포스코실리콘솔루션이 지난 달 포항에 연산 550톤 규모 실리콘음극재(SiOx: 실리콘 산화) 공장을 준공한 것. 포스코그룹 소재 계열사 포스코퓨처엠도 포항에서 실리콘 탄소복합체(SiC) 음극재 데모플랜트 가동을 시작했다. 업계는 이 공장 준공을 기점으로 실리콘 음극재 시대가 열린다고 본다.
포스코실리콘솔루션 실리콘음극재 공장 현황/그래픽=윤선정포스코실리콘솔루션 실리콘음극재 공장 현황/그래픽=윤선정
포스코 외에도 SK와 롯데 등이 실리콘 음극재 사업을 진행 중이다. 실리콘음극재는 현재 리튬이온전지에 대부분 적용되는 흑연음극재보다 에너지밀도를 4배 가량 높일 수 있어 전기차 주행거리 향상과 충전시간 단축이 가능하다. 특히 충전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실리콘 음극재의 실리콘 함량이 10%를 넘어서면 30분 이상 걸리는 전기차 충전시간은 5분이 된다. 현재 양산되는 제품의 실리콘 함량은 5% 수준인 것으로 파악되는데, 함량을 높인 양산기술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충전시간을 줄이면서 주행 가능거리 손실을 최소화하는 기술 개발도 한창이다. 삼성SDI는 9분만에 8%에서 80%까지 충전이 가능한 급속 충전 기술을 내놨다. SK온은 기존 배터리 대비 에너지 밀도를 9% 높이면서 충전시간은 유지한 '어드밴스드 SF 배터리'를 제시했다. 여기에다 전고체 배터리도 캐즘을 극복할 게임 체인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전고체 배터리는 양극과 음극 사이에서 이온을 전달하는 매개체인 전해질을 체로 대체한 차세대 배터리로 주행거리가 길고 화재 위험성이 적어 '꿈의 배터리'로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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