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여자’, 크리스

임현경 ize 기자 2019.12.04 08:12
글자크기
©크리스 인스타그램©크리스 인스타그램


“나다.” 유튜브 채널 ‘소련여자’의 크리스의 인사말이다. 러시아 출신인 그는 매번 무표정하게 카메라를 직시한 채 로봇처럼 딱딱한 말투로 자신이 바라보는 한국을 이야기한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을 “싸우는 사람, 술 취한 사람, ‘양키 고 홈’ 하는 미친 아저씨”가 있다며 ‘한국의 작은 러시아’, ‘움직이는 시베리아’라고 묘사하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며 포교하는 이들을 두고 “처음엔 주술사들인 줄 알았다. 러시아에선 그러다간 본인이 먼저 지옥 간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지하철은 사람이 내리면 타라”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크리스는 ‘틈만 나면 야구 방망이로 위협한다’, ‘가정에서 흔히 곰을 키운다’ 등 러시아인에 대한 누리꾼들의 농담에 장단을 맞춰주고, 영화 ‘타짜’ 속 곽철용(김응수)의 대사 “묻고 더블로 가”나 KBS2 ‘VJ 특공대’의 내레이션 “콸콸콸”을 모사한다. 웹 예능에 삽입되는 효과음 ‘두둥탁’을 육성으로 내기도 한다. 그러나 크리스가 ‘한잘알(한국을 잘 아는 사람)’인 것은 단순히 비속어나 온라인상의 유행에 능통해서가 아니다. 그는 누리꾼들이 ‘한국에 우호적인 외국인’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나는 싸이, 강남 스타일, 독도, 김치, 박지성, 김연아를 안다’라는 영문이 새겨진 가방을 소개하다가 한 술 더 떠 “왜 뽀로로는 없냐”라고 능청피우고, “그래, 나 국뽕이야. 나도 국뽕 잘해서 영국남자처럼 될 거야. 김치, 추노, 박지성, BTS, 손흥민 만세”라고 외친다. 또한 ‘천국에 가는 방법’이라며 김밥천국을 소개하고 ‘한국의 유토피아’로 무한리필 갈비집과 코인빨래방을 꼽는다. 그의 콘텐츠는 얼핏 ‘영국남자’, ‘올리버쌤’ 등 한국 문화를 접한 외국인들의 반응을 보여주며 인기를 얻은 유튜브 채널과 유사하게 보인다. 그러나 크리스는 한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한편 애국심을 부리는 한국인을 풍자한다는 점에서 그들과 차별성을 갖는다.



‘호날두 불매운동 외국인 반응’, ‘컴퓨터 조립하는 외국인 여자’, ‘일본 불매운동 외국인 반응’과 같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크리스는 외국인 여성을 향한 기대 또는 편견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그리고 때론 비틀어버린다. KBS2 ‘추노’의 대길(장혁)의상을 입고선 “왜 또 할로윈이라고 할리퀸 따라하고 그럴 줄 알았어?”라고 묻고, ‘한국인 남자친구의 계정으로 영상을 올렸다가 삭제했다’라든가 ‘틴더에서 목격했다’라는 남초 사이트의 의혹제기에 대해 “엥겔스 비트코인 사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틴더? 해본 적도 없다. 아니, 근데 했어도 뭐가 문제야? 공산당이야?” ‘자유 민주주의’ 국가 국민으로서 묘한 우월감을 드러내는 이들의 모순적인 시선을 ‘공산당’이라는 단어로 콕 집어 가리킬 만큼, 크리스는 누가 자신의 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는지에 대해 명확히 파악하고 있다. 러시아 금지구역으로 ‘축구경기가 있는 날의 펍’을 소개하며 훌리건의 특징과 정부 대책을 전한 그는 해당 영상 말미에 “사실은 이 정보 다 유튜브랑 나무위키보고 찾았다”라고 고백한다. “잠깐, 그거 쓰는 녀석들도 사실 나처럼 어디서 보고 쓰는 거 아니야? 인터넷 세상에 진실이 있긴 한 걸까?” 짓궂은 장난 뒤 따라오는 물음은 온라인상의 정보를 비판 없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이들을 날카롭게 겨눈다.

크리스는 이런 전략을 통해 ‘동영상 5개로 20일 만에 구독자 14만을 모으는 방법’이라는 그의 영상 제목처럼, 단기간에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그를 향한 일부 시선은 크리스가 비꼬곤 하는 내용들에서 나아가지 못한다. 해당 영상에 달린 댓글이 성공 원인으로 “아름다운 얼굴”을 첫손에 꼽자 “외모는 평범하다”, “저 정도면 예쁜 거다”, “우크라이나나 베네수엘라에선 평타다” 등 외모 평가가 줄을 이었다. ‘소련여자’를 단순한 ‘기믹(Gimmick, 이목을 끌기 위한 특징적 행위)’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크리스가 그러모아 보여주는 각종 ‘밈(Meme, 모방에 의해 전파되는 문화정보)’과 그를 향한 대중의 반응은 그 자체로 한국이다. 소련여자가 정말로 한국인을 ‘참교육’시키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