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가 안보여요"… 대선토론 5명에 수화 통역은 1명뿐

머니투데이 이재윤 기자 2017.04.24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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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더이슈]이미혜 수어통역사 "대선 TV토론회 수화방송 사실상 무의미"

제19대 대통령선거 TV토론회(위쪽) 지난해 실시된 미국 대통령선거 케이블방송 C-SPAN의 토론화면./사진=KBS, C-SPAN제19대 대통령선거 TV토론회(위쪽) 지난해 실시된 미국 대통령선거 케이블방송 C-SPAN의 토론화면./사진=KBS, C-SPAN


"대선후보 TV토론회를 소리 없이 들어보세요. 소리를 '눈으로 듣는' 농아인(청각장애인)에게 통역 화면이 작다는 건 그런 느낌이죠. 후보들 말도 빠르잖아요. 근데 아직 수어(수화언어) 이름도 없어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주관 대통령선거 토론회를 앞둔 지난 21일 서울 서대문구 수화전문교육원에서 만난 이미혜 수어 통역사(51)는 "농아인에게 지금의 대선 TV토론회는 사실상 무의미한 방송"이라고 지적했다.



한국농아인협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한 그는 국내 하나뿐인 수화교육원에서 강사로도 활동 중이다. 남편, 친척 등이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그는 25년 넘게 관련 일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는 이날 대화 대부분을 수화로 표현했다.

이미혜 수화통역사가 지난 21일 서울 서대문구 한국수화전문교육원에서 "대통령선거 TV토론회를 통해 농아인(청각장애인)들이 전달받는 내용은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사진=김창현 기자이미혜 수화통역사가 지난 21일 서울 서대문구 한국수화전문교육원에서 "대통령선거 TV토론회를 통해 농아인(청각장애인)들이 전달받는 내용은 거의 없다"고 강조했다./사진=김창현 기자
◇"수어는 공간언어…소리 없이 토론회 듣는 꼴"
이 통역사는 비장애인조차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어 통역사 화면이 작다고 지적했다. 특히 5명 대선후보의 말을 1명이 전달하기 때문에 전달력이 굉장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정치·사회·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본 없이 논쟁을 벌이는 토론회를 1명이 통역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이 통역사는 "수어는 손 모양뿐 아니라 몸짓 크기와 방향 등 공간을 활용해 표현해야 하는데 지금의 작은 화면은 너무 제한적"이라며 "대화가 겹치거나 화면과 다른 사람이 말하면 농아인에게 혼란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수어와 국어는 완전히 다른 언어"라며 "농아인은 내용을 수어로 바꿔 이해하고, 자막방송이나 신문기사를 봐도 머릿속에서 수어로 이해하기 때문에 수어 통역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질 낮은 수화방송은 농아인의 참정권 침해로 이어진다. 국내 25만여 명(2015년 등록장애인 기준)에 달하는 청각장애인은 대선뿐 아니라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의 제대로 된 '목소리를 본' 적이 없다.


이 통역사는 "단순히 농아인에 대한 배려부족의 문제가 아니다"며 "농아인은 TV토론에서 선거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도 얻지 못하는데 청각장애의 특성상 문해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고 글로 정보를 전달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미혜 수어통역사는 대화를 대부분 수화로도 표현했다. /사진=김창현 기자이미혜 수어통역사는 대화를 대부분 수화로도 표현했다. /사진=김창현 기자
그는 이어 "선거 토론 수어 통역은 농아인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지만 법적 강제조항도 아니기 때문에 TV토론을 제공하는 측에서 오히려 생색을 내는 경우가 있다"며 "비장애 시청자들은 수어 통역 화면이 거슬린다고 민원을 넣기도 한다"고 말했다.

현행법(공직선거법)에서 수화와 자막방송은 강제사항이 아니다. 방송광고를 비롯해 후보자 연설 방송, 대담·토론회 등에서 수화·자막방송을 '할 수 있다'는 정도로만 규정하고 있다.

이 통역사는 "미국 등 해외에선 대선의 경우 토론자 수마다 수어 통역을 실시하고 화면도 3분의 1 넘게 할애한다"고 말했다.

◇국내방송 낮은 질 문제…봉사가 아닌 전문직 인식 필요
이 통역사는 선거방송뿐 아니라 평소 농아인을 위한 방송의 질도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선거방송과 달리 농아인을 위한 국내 방송 기준은 상당히 높은 편이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설명이다. 방송법에 따라 일반방송의 수어 방송은 전체프로그램의 최소 5% 이상을 방영한다. 지상파 자막방송은 100% 실시되고 있다.

이미혜 수화통역사 / 사진=김창현 기자이미혜 수화통역사 / 사진=김창현 기자
그는 "자막방송은 화면에 나타나는 화자의 대화를 따라가기에 바쁘다. 2줄 형태의 스크립트가 계속해서 위로 밀려나기 때문에 빠르게 읽는 것이 어려운 농아인들에겐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 통역사는 수어 통역업무를 직업이 아닌 봉사로 바라보는 문제점도 지적했다. 그는 "수화 통역을 봉사로 해주면 안되느냐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며 "이 일도 엄연히 직업인데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다는 이유로 봉사로 보지만 수어 통역은 엄연히 전문직"이라고 말했다.

그는 수화통역 현장도 열악하다고 털어놨다. 그는 "방송현장에서 수어 통역사에 대한 배려는 거의 없다"며 "부스가 마련된 곳은 것의 없고 소음은 물론 어수선한 현장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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