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뭘 잘못했다고"…라푼젤 대통령과 벙어리 참모들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2017.04.16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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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300] [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세월호 3주기…스스로를 고립시킨 대통령, '심기 경호' 위해 직언 못하는 참모들

"내가 뭘 잘못했다고"…라푼젤 대통령과 벙어리 참모들


2007년 8월, 청와대 대통령 관저 접견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김병준 정책특별보좌관(특보)과 마주 앉았다. 그해말 대선을 앞두고 막 출범한 대통합민주신당이 화제에 올랐다. 노 대통령은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대통합신당 합당을 용인할 생각이었다.

김 특보가 직언했다. "신당을 인정하지 말고 열린우리당을 지키셔야 합니다. 그래야 퇴임 후 제대로 숨을 쉬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단칼에 잘랐다. "대세라 어쩔 수 없어요. 또 신당에 가서도 이쪽 사람들이 잘 할 겁니다. 대선후보가 될 수도 있어요."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등 이른바 '친노계'가 대통합신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김 특보는 물러서지 않았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못 이깁니다.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다 합쳐봐야 3이 아니라 1.3 밖에 안 됩니다. 정동영은 1.5입니다. 상대가 안 됩니다." 노 대통령이 발끈했다. "이해찬 한명숙이 왜 안 돼요? 또 내가 뭘 잘못했다고 퇴임 후 걱정을 해야 됩니까!" 그리곤 덧붙였다. "정치도 안 해 보고 선거에도 안 나가본 사람이 뭘 그렇게 잘 안다고." 김 특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열린우리당은 대통합신당과 합당했지만 친노는 대선후보 배출에 실패했다. 대통합신당의 대선후보가 된 정동영 의원은 그해 대선에서 이명박 전 서울시장에게 참패했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 수사를 받던 중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친노는 폐족의 길로 들어섰다.



그해 여름 노 전 대통령의 인식은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노 전 대통령의 말대로 정치도 선거도 안 해본 김 특보조차 아는 걸 '정치 9단' 노 전 대통령은 몰랐다. 왜 그럴까?

이유는 정보의 왜곡과 차단이다. 대통령에게 정보가 집중되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정보가 모두 정확한 건 아니다. 많은 경우 정보가 왜곡된 채 대통령에게 전달된다. 때론 정보가 통째로 걸러지고 보고에서 누락되기도 한다. 주로 부정적인 내용들이 그 대상이 된다.

정보의 왜곡과 차단은 주로 청와대 참모들에 의해 이뤄진다. 대개는 참모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다. 부정적인 내용의 경우 대통령의 질책이 두려워 보고할 때 은근슬쩍 빼거나 내용을 밝게 포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짜 책임은 대통령 본인에게 있다. 역대 상당수 대통령들이 임기초가 지나면 부정적인 보고에 대해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참모들로선 대통령의 '신성한'(?) 심기를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낙관적인 내용 중심으로 보고할 수 밖에 없게 된다.


정보의 왜곡과 차단이 반복되면 대통령은 서서히 외부세계로부터 단절된다. 높은 탑에 갇힌 동화 속 주인공 '라푼젤'과 다를 바 없다. 이는 대통령의 안이한 현실 인식으로 이어진다. 1997년 외환보유고가 빠르게 고갈되고 있는데도 '저환율' 정책을 고수하다 결국 외환위기를 초래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당시 강만수 통상산업부 차관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에게 외환위기의 위험을 경고하며 저환율 정책을 포기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김 전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여전히 튼튼하다"는 보고만 올라갈 뿐이었다.

세월호 참사 3주기다. 비극이 벌어진 그날 오전, 누구도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사태의 심각성을 보고하지 않았다. 참모들 중 단 한명도 "집무실이나 위기관리상황실로 출근해 구조 작업을 지휘해야 한다"고 직언하지 않았다. 관저에서 쉬고 있는 대통령을 귀찮게 할 순 없다는 이유였다. 전형적인 '심기 경호' 행태다. 이런 '작은 충성'은 '세월호 7시간' 논란을 낳았고, 결국 대통령 탄핵의 단초를 제공하는 '큰 불충'이 됐다. 대통령이 집무실에 나와 있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 집무실을 이전하겠다는 공약들이 쏟아진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광화문 정부서울청사에 집무실을 차리겠다고 했다. 소통을 늘리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중요한 건 대통령 집무실의 위치가 아닌 대통령의 태도다. 대통령이 부정적인 보고에 인상을 찌푸리기 시작하는 순간 정보는 왜곡되고 차단된다. 대통령이 집무실이 아닌 관저에 머물러 있어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을 현실에서 고립시키는 건 대통령 자신이다. 5월10일, 탑 속의 라푼젤이 아닌 광장의 대통령이 탄생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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