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雜s]일흔 다섯에 만난 애인 빌리

머니투데이 김준형 산업1부장 겸 부국장 2017.01.02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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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40대 남자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도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40대의 다이어리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50雜s로 바뀝니다. 계속 쓸 수 있다면...

젊은 시절 올리버 색스/사진= 색스 자서전 '온 더 무브'젊은 시절 올리버 색스/사진= 색스 자서전 '온 더 무브'


해마다 연말에 몰아치기 독서(정확히는 도서구입)로 죄책감을 달랜다.
주로 언론사나 출판사 서점이 집계한 '올해의 책'에 공통으로 선정된 책 중에 영화 보듯 술술 읽히는 것들이다.

올해는 나의 '올해의 책들에서 추린 올해의 책' 리스트 7권에 의사가 쓴 책, 그것도 이미 세상을 떠난 의사가 쓴 책이 두 권이다. 그 중 하나는 신경과 전문의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온 더 무브(on the move)'이다. 환자들과의 만남을 토대로 인간의 뇌와 정신의 관계, 그리고 의사로서의 유대감과 고뇌를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게 써내려간 저술가이자 의사이다(그의 책 'Awakening'을 영화화한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사랑의 기적(1990)'은 꼭 다운 받아 봐야겠다).



내용도 많이 알려졌고, 훌륭한 서평들은 이미 여럿 나왔다(가장 최근에 나온 건 정혜승 카카오 정책실장의 글이다)...내 눈에 꽂힌 한 문장은 책 맨 앞의 헌사 '빌리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이다.

대개 헌사는 가족들이나, 스승에게 바쳐지는 거라 무심코 넘어갔다. 책을 읽다가 색스가 게이였다는 걸 알게 됐다. 결혼도 하지 않았다. 그럼 빌리는?
492페이지 짜리 책에, 472페이지에 가서야 빌리가 나온다.



"2008년 일흔 다섯번째 생일을 맞은지 얼마 안 되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다...이제나 저제나 전화가 걸려오기만을 기다렸다...가슴에는 사랑과 죽음, 무상함이 한데 뒤엉킨 어떤 강렬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바이커로, 아마추어 역도 선수로, 장거리 수영 애호가로,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는 체력으로 살아왔던 색스이지만 불치병 '노환'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병마와의 싸움에서 그에게 힘이 된 건 글을 쓴다는 공통점을 지닌 빌리와의 '사랑'이었다.
"사랑에 빠진 기쁨이 신경통과 맞서서 딜아우디드나 펜타닐만큼이나 강력한 진통효과를 낸 것일까" 의사 아니랄까봐 진통제 이름을 동원해가며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 75세 할아버지의 열정이 존경스러웠다(성적 취향까지 공감하는 건 아니다 ㅎ).
"가끔 돌아보면 내 인생이 일상의 즐거움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느껴지곤 했는데 이것이 빌리와 사랑에 빠지면서 달라졌다"
오 마이 갓~ 이 양반, 이 때의 애정 연령을 재 봤다면 몇 살이 나왔을까.

내가 원래 그림을 봐도 전체보단 한 귀퉁이 특이한 장면에 시선이 붙잡히는 스타일이긴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그의 '사랑'과 '나이'에만 눈이 자꾸 갔
던 건 한 해를 보내는 연말이기 때문에 더 그랬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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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그러니까 지난 주), 신문들이 연일 여러 기업들의 인사 명단으로 도배가 됐다. 기업 인사라는 게 △승진 아무개 △전보 아무개...이렇게 나올 뿐 △퇴직 아무개 △해임 아무개 △음수(飮水) 아무개 이렇게 알려주는 법은 없어서 누구누구가 옷 벗고 나갔다는 소식은 늘 알음알음 '뒷 이야기'로 전해진다.

가장 자주 듣는 '인사 해설 박스'의 하나가 몇 년생까지 옷을 벗었다는 이야기다.
SK그룹 같은 경우는 우연인지 60년생인 최태원 회장보다 나이 많은 경영진들이 대부분 물러났다. 주변 언론사에서도 '2,3세'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자리에서 물러난 사람들의 소식이 여기 저기서 들린다. 대개는 50대 후반 언저리들이다.

60년 생이면 우리 나이로 이제 58세, 만 나이 57세이다. 50대가 된 60년대 출생자들을 '5060세대'라고 부른다면, 50년대에 태어나 60세를 바라보고 있거나 넘겼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밀려나는 상황이 된 요즘, 우리 나라는 본격적으로 5060세대가 주도권을 쥔 나라인 셈이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는 지난달 한 포럼에서 "공공부문에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56세가 되면 물러나야 한다"고 했으니 얼추 50년대에 태어난 사람이 물러난 SK그룹 인사와 맥이 닿는다.

70대 중반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가정보원장들이 국정농단의 주연 내지 들러리 역할을 해 온 나라다. 어지간히 했으면 이제 좀 물러들 났으면 하는 생각에 100%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렇다.

문제는 육체적 나이가 아니다. 과거와 비교하면 지금 나이에 0.8(심지어 0.7)을 곱해야 육체 나이라고 하지 않는가. 인사에 나이를 기준으로 삼는건 위헌 소송 대상이기도 하거니와, 우리 사회가 목격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노친네'들의 행태는 그들의 육체가 늙어서가 아니다.

올리버 색스처럼, 82세로 죽기 직전까지 환자에 대한 애정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운명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남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용기를 지녔다면 70대 비서실장이 아니라, 90세 대통령이라도 못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76세의 버니 샌더스 후보는 청년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얼마전 건강검진에서 신체나이를 검증해봤더니 -2.7세, 즉 47.3세라는 진단이 나왔다. 겨우 그 정도 되려고 마라톤이니 철인3종이니 난리를 피웠냐는 비웃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받았다.
신체나이 측정의 정확도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정확히 측정할 수만 있다면 '정신 나이'도 재서, 민간이건 공공부문이건 사람 쓰는 기준으로 삼았으면 좋겠다(정신나이 측정을 해보면 나는 +20, 30으로 이미 팍삭 늙어 있지나 않을지 더 걱정이 되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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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그러니까 작년말), 회사 앞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금융권 임원을 만났다. 그 전날 '전 임원'이 됐다고 했다.

63년생, 만 53세 되는 형님이다. 임원 된지 2년 밖에 안됐고 돌쇠처럼 일해왔다고 자부했던 터라 해임 통보로 받은 충격이 커 보였다. 가족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마음을 추스리고, 그동안 신세 졌던 분들께 인사하러 다닌다고 했다.
"왠 일로 오셨냐"고 물었다가 상황을 듣고 잠시 뒷말을 잇지 못하다가, 어깨를 끌어안고 한번 포옹을 해 드렸다.
"축하드려요, 까짓거 인생 별 거 있나요, 노동자가 아이런 마인드 아이런 바디(Iron Mind, Iron Body) 있으면 됐지 뭐"

그 형님에게만 한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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