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공수사들, 탈법 선언…'김영란법2'가 필요해

머니투데이 김준형 산업1부장 겸 부국장 2017.01.01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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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세종문화 회관 뒤편에 '시편재'라는 한정식집이 있다.
지난해 9.28 이후 공무원이나 '공무원 등', '공수사'(공무수행사인)같은 청탁금지법(김영란법) 대상자들이 방앗간처럼 들르는 곳이다. 손님이 늘다 보니 종업원도 얼마전 다시 충원했다.

미모를 갖춘 젊은 쥔장의 경쟁력도 있겠지만, 생존을 위해 내건 파격적 메뉴가 먹혔다. 가격이 만만찮은 고급 한정식집이었는데 '김영란법' 시행 이후 1인당 3만원짜리 상차림을 만들었다. 과식하기 마련이었던 이전 상차림에 비해 위 부담은 줄었지만 여전히 푸짐하고 깔끔한 음식이 입맛을 돋운다. 술은 소주 맥주 상관없이 무한정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면 된다. 단, 2시간이 넘어 가면(첫 술 뒤부터인지, 착석 이후부터인지는 불분명하다) 1인당 1만원이 추가된다.



술에 취하든 말에 취하든 2시간은 후딱 지나간다. 이렇게 되면 계산할 때 ‘준법파’와 ‘탈법파’의 밀당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다. 김영란 법 시행 초기엔 "3만원 넘어가는 돈은 각자 계산 해야 한다"는 준법파의 완승이었다.
점차 "3만원 위로 삐죽 튀어나온 몇 푼 갖고 야박하게 그러느냐"는 탈법파들의 취중 탈법 선언이 점점 힘을 얻어 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점입가경이 되면서는 탈법파가 승기를 장악한 듯 하다.

나 역시 연말 망년 시즌을 거치면서 김영란법 줄타기를 했다. 학연 혈연 지연 인연 악연 흡연 등등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 둬도 만날 분들(주로 연장자들이) 먼저 계산해버리고 고집을 꺾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더치페이로 약속하고 모처럼 소고기 먹고는 상대 측이 몰래 계산을 해 버려서 ‘할수 없이’ 기어코 2차를 끌고 가서 우리가 계산을 하기도 했다.
계산대 앞에서 먼저 지갑을 꺼내는 분들이 고맙지 않을 리 없지만, 범법자가 되는 마음은 한없이 불편하다. 그 때마다 그 분들이 하는 말 "지들이나 잘 하라고 해"



지들이나 잘하라는 말은 기업들 내부에서도 나온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얽힌 강도가 큰 기업일 수록 책 잡힐 일이 없나 단속이 철저하다. 그런 기업들은 이전부터도 내부 감시가 엄격하고, 직원들에 대한 규정이나 매뉴얼도 잘 돼 있다. 김영란 법도 한 치의 어김도 없이 지킨다.
그렇기에, 내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기업 구성원들의 상실감과 반감도 크다. 우리가 쓰는 작은 돈엔 그렇게 한푼 한푼 따지면서, 천문학적인 돈이 흘러 나가는 데는 어떤 제동장치가 작동했느냐는 허탈감이다.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특정 사업이나 현안에 대가를 바라고 돈을 줬다는 건 어불성설"이라면서도 "그런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 돈을 줄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돈의 많고 적음, 대가성 여부를 떠나 직원들에게 '너나 잘해'라는 말을 듣게 된 게 기업인들로서는 부끄럽고 뼈아프게 여겨야 할 대목이다.

'너나 잘해'라는 말로 탈법이 정당화되고, 내부 규율이 무너지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하루살이나 걸려 들고, 큰 새들은 뚫고 지나가는 '거미줄 법' 뿐 아니라, 권력과 기업 간에 적용될 김영란법 '2탄'이 필요한 이유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등장 인물들이 '국익'을 입에 올리고 '순수한 뜻'을 방패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재단이건 기금이건 어떤 명목으로도 돈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법제화 하자는 말이다. 정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국회 동의를 얻는게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원칙에 맞는다.


한 재계 임원은 "평창 올림픽에 기업들이 돈을 낸 것도, 정권과의 관계를 의식해서인데, 이건 왜 '포괄적 뇌물'로 단죄하지 않느냐"고 했다. 스스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들면 팔 비틀지 않아도 기업들이 알아서 돈을 내려고 경쟁을 할 것이다. 민간 기업의 입맛에 맞지 않지만 꼭 해야 할 일이라면 세금으로 감당해야 한다.

말 난 김에, 부당하게 모은 돈들은 지출을 중단하고 한시라도 빨리 돌려주는게 맞다. 미르·K스포츠재단이 아직도 돈을 쓰며 굴러가고 있다는 건 아무리 봐도 비정상이다.
모금 과정이나 할당비율 등이 미르·K스포츠재단과 판박이면서도 '자발적'이라고 거짓 선전했던 청년 희망재단도 해산하고 돈을 돌려 주는게 맞다. 기업 총수는 그렇다쳐도 지금도 '자발적으로' 월급에서 꼬박꼬박 자동이체로 돈을 내고 있는 월급쟁이들은 무슨 죄인가.

권력 남용이 제동 걸리고 비정상이 원상복구 되는 걸 보여주는 게 청년들에게 그나마 희망을 주는 길이다. 병신년의 바통을 이은 정유년이 ‘정경유착 근절 원년’으로 기억될 가능성도 높아지는 첫 걸음이다.
[광화문]공수사들, 탈법 선언…'김영란법2'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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