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雜s]"이 전화는 녹음되고 있습니다"

머니투데이 김준형 산업1부장 겸 부국장 2016.11.21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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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파놉티콘...'투명사회'의 명암

편집자주 40대 남자가 늘어놓는 잡스런 이야기, 이 나이에도 여전히 나도 잡스가 될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못하는 40대의 다이어리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50雜s로 바뀝니다. 계속 쓸 수 있다면...

[40雜s]"이 전화는 녹음되고 있습니다"


A씨는 시위에 참가했다가 '교통방해죄'로 기소됐다. 경찰에 체포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고 경찰이 기소했을까 궁금했다. 정식 재판과정에서 알고 보니 페이스북에 올린 시위참가 사진을 정보과 형사가 보고 수사를 했다는 것. A씨 변호사에 따르면 형사는 A씨와 3년간 페이스북 친구였고, A씨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도 페친을 맺은 뒤 이런 방식으로 수사에 활용해왔다.

거대한 빅데이터가 축적되는 사회에서는 이처럼 디지털 데이터가 '빅 브러더'의 지위를 차지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투명사회'에서 기존의 '신뢰' 개념은 빅데이터로 파괴된다고 했다.



흔히 '투명성'은 긍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디지털 사회에서 투명성은 사람의 모든 것을 밖으로 표출시키고 정보로 전환함으로써 지배시스템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하는 신자유주의의 요구이자 획일화의 상징이라고 한병철은 규정했다. 사람들은 서로 열심히 소통하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노출시킴으로써 디지털 파놉티콘(한 사람의 간수가 수많은 죄수를 한번에 감시할 수 있도록 방사형으로 만들어진 감옥을 말한다)을 건설한다.

4주째 지속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위한 촛불시위만 하더라도 참가자들은 SNS를 통해 소통하고 표현함으로써 디지털 빅데이터를 쌓아가고 있다. (여러분들이 올린 페북 사진이 언제 자신을 공격하는 무기가 돼 돌아올지 모른다)



문제는 평민들의 디지털 소통은 '파놉티콘'을 건설하는데 반해, 권력 내부의 은밀한 소통은 좀처럼 공개되고 정보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쩌다 우연히, 혹은 권력간의 갈등을 빌미로, 혹은 영웅적인 희생으로 그같은 거래가 알려졌을 때야 우리는 "세상에~"를 연발하고 분노하게 된다.

(잃을게 없어 스스로를 부담없이 내보이는 평민들과 달리) 소수의 권력자는 데이터를 남기지 않고 은폐하기 위해 더욱 조심한다. 그들이야말로 '투명성'의 위험성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디지털 파놉티콘에 러다이트(산업혁명기의 기계파괴운동)처럼 맞설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누구나 평등하게 아니, 누리는 권력과 부 명예에 비례해 파놉티콘 앞에 노출되는 사회를 만들고 감시하는 것이다.


아무리 조심하려고 해도 고도로 복잡다단해지고 스피디해진 시대에는 아날로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수가 없다. 검찰이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을 '공범'으로 적시하기에 이른 데는 고비고비마다 폭로된 디지털 데이터의 힘이 존재했다.

최순실과 청와대간 오간 이메일, 최순실의 의상실 영상파일, 청와대 수석의 총수퇴진 협박 음성 파일, 스포츠스타에 대한 퇴진 압박을 담은 통화내용이 곳곳에 데이터로 남아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동네깡패나 고리대금업자같은 상상초월의 범죄혐의들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데이터 파일들은 국민의 힘, 권력의 원천에 진지한 고찰을 새삼스럽게 할 수 있게 해주는 출발점이 됐다. 빅데이터의 '활용자'였던 권력이 빅데이터 앞에 평등하게 노출되면서 가능했던 일이다.

물론 모든 통화가 녹음되고 모든 기록이 남는 사회에서 고전적 의미의 '신뢰'가 살아남을 여지는 없어진다. 하지만 신뢰라는 탈을 쓴 '패거리 권력', 의리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권력형 범죄'의 위협이 디지털 빅브러더가 가져올 신뢰상실의 위기보다 훨씬 큰게 우리가 처한 단계다.

기업들은 "언제까지 이런 일이 되풀이될지 모르겠다, 주고 싶어서 줬겠느냐"고 말한다. 개별 기업마다, 혹은 재계 전체의 현안과 약점을 권력과 비선실세가 콤비를 이뤄 파고 들었을때, 이를 기업들이 거부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나간 돈은 '포괄적 뇌물'이라는 이름의 족쇄가 되기 십상이다.

'디지털 빅데이터'는 이런 흑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자위 수단이다. 부당한 압력이 가해질 때 이를 녹음하고 기록하고 자료화해서, 의사결정 구조를 통해 공유하고 대응방안을 논의하는 체제가 없이는 언제건 다시 갈취의 대상이 되고 공범의 지위로 떨어질수 있다.
'죽어도 최고 권력자의 비리는 불지 않는다'는 공포와 공모의 침묵이 유지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권력은 다음에도 기업들의 주머니를 쌈짓돈으로 여긴다.

아날로그 시대의 '사관' 역할을 하는 디지털 시대의 데이터는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고, 언젠가는 공개된다는 것. 그래서 치명적인 X-파일로 돌아온다는 걸 권력이 두려워하게 만드는 게 디지털 '투명시대'를 활용하는 행동 양식이다.

정부가 '부패방지법(김영란법)' 홍보를 위한 휴대전화 통화연결음(컬러링)을 만들어 배포한 적이 있다. 훨씬 거대한 권력형 부패 방지용 컬러링, "투명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이 통화는 녹음되고 있습니다"라는 낭랑한 목소리를 듣는다면 누구도 감히 "뭘 잘 몰라서 그러시는데..." 이런 깡패 짓을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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