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인턴은 카드 영업사원"

머니투데이 도병욱 기자 2009.03.15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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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없이 돈받잖아" 압박

"신용카드 100장과 이력서 한 줄을 바꿨습니다. 오늘 한 선배가 '은행이 왜 너에게 돈을 준다고 생각하나. 카드 영업이나 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인턴에게 정규직 채용 운운하면서 카드 만들어오라니..."

지난 11일 한 취업 관련 사이트에 올라온 한 인턴의 하소연이다. 시중은행들이 일자리 나누기(잡셰어링)에 동참한다며 뽑은 인턴이 신용카드 영업사원으로 전락하고 있다. 자연스레 은행에서 일하고 있는 인턴사원들의 한숨 소리는 하루하루 커져가고 있다.



자신을 A은행 인턴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은 "지점에 배치 받은 지 1주일 만에 카드 영업이나 하라는 말을 들었다"는 글을 올렸다. 그는 "카드 가입을 유치해왔으면 좋겠다 정도로 이야기 하면 웃으면서 하겠다"며 "한 선배는 직원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넌 하는 일도 없는데 은행에서 돈을 받는다. 그러니 카드 영업이나 하라'고 말했다"고 토로했다.

A은행은 인턴 중 일부 성적 우수자에게 서류전형 및 1차 면접전형을 면제해주고 최종 면접을 볼 수 있게 해 줄 방침이다. 토익점수 900점에 만점에 가까운 학점을 받은 '고스펙' 구직자들이 즐비한 요즘 포기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게다가 성적 평가를 지점장 및 지점 직원이 담당하다 보니 인턴에게 그들의 말은 곧 '법'이다. 인턴입장에서는 카드 영업 요구를 거절하기란 불가능하다. 인턴에게 '정규직 채용'이라는 미끼를 던져놓고 지점 실적을 올린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다른 은행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다른 은행 인턴인데 카드 영업 압박이 심해 결국 가족과 친구들에게 부탁해 카드를 만들었다"는 댓글이 즐비하다. "카드 신청서 100장을 주면서 채워오라고 지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카드 사용 실적까지 만들어내라고 한다"는 푸념까지도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일부 영업점에서 인턴에게 카드 영업을 시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지점의 일부 직원들이 자의적으로 카드 영업 지시를 내리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사례가 더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카드 영업을 시키지 않는 은행들이 더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또 B은행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고 밝힌 한 네티즌은 "하루 종일 커피를 타고 설거지를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직원들 먹을 밥을 짓는다"고 호소했다. 그는 "지점 특성상 이 일을 계속해야 할 분위기"라며 "이 지점에 종으로 왔는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이 외에도 많은 인턴들은 "하는 일이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돈이 오가고 고객 신용정보를 열람하는 은행 업무 특상 인턴들이 취급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시재 박스(돈통)를 정리하고, 정수기 물통을 교환하고, 영업점을 방문하는 고객에게 인사하는 등 단순 업무 외에 할 일이 없다는 불만이 이어지고 있다.



한 영업점에 배치됐다는 인턴은 "컴퓨터는 고사하고 앉을 자리도 못 받았다"며 "손님접대 하는 곳에서 잠깐 앉았다가 크게 혼난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어느날 갑자기 날아온 인턴을 받아야 하는 은행 직원들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한 은행 지점 직원은 "인턴을 받을 준비가 안된 상태기 때문에 어떤 일을 시켜야 할 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며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준비가 안됐다고 넘기기에 인턴들이 겪는 스트레스는 너무 크다.

인턴들의 급여도 논란이 되고 있다. C은행 인턴사원들은 최근 첫 월급명세서를 받은 뒤 어깨가 축 쳐졌다. 당초 급여가 월 70만원인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실제 명세서에 찍힌 금액은 44만원에 불과했다. 2월 9일부터 근무를 시작한데다 의료보험료 등을 제외하고 나온 금액이다. 한 인턴은 "4대보험료를 차감하는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듣지도 못 했다"며 "한 달 채워서 출근한 3월분 월급도 약 60만원 밖에 못 받는다 생각하니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일부 은행에서는 인턴들이 정규직 구직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주 3일 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인턴 입장에서 자기 시간을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월급 역시 줄어들어 "차라리 과외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푸념이 나오고 있다.

이력서에 'OO은행 인턴'이라는 한 줄을 채우기 위해 감내해야 할 고통이 너무 크다. 사회생활에서 처음 배워야 할 덕목이 '인내' 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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