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자금을 실물로 유도하라"

머니투데이 이승제 기자, 전병윤 기자 2009.01.1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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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부동자금 확대…신속한 구조조정이 해법

200조원이 넘는 것으로 추정되는 시중 부동자금을 실물 부문으로 유도하기 위한 조치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돈맥경화 현상'은 금융·실물 위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금융·실물시장을 짓누르며 기업 구조조정 추진, 한국 경제의 회복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거시경제실장은 12일 "끊임없는 펌프 가동으로 유동성이 넘쳐나고 있지만 정작 돈의 회전(유통)속도가 크게 떨어지며 병목현상이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며 "유동성 공급은 국내외 신용경색 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극약처방(외통수)이긴 하지만, 이제 그에 따른 폐해와 해소방안을 고려할 때"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기업 구조조정의 신속한 추진만이 돈맥경화를 풀어낼 해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또 채권시장안정펀드, 은행권 자본확충펀드 등 시장안정 대책이 당초 취지와 달리 파행을 거듭하며 시장불신을 키우고 있다고 비판한다.

◇갈 곳 잃은 유동성= 한은은 지난해 리먼브러더스 사태(9월 15일) 이후 이달 12일까지 외화유동성 27조5000억원, 원화유동성 19조2000억원, 예금지급준비금 이자 5000억원 등 무려 47조5000억원을 시중에 풀었다.



하지만 시중 부동자금은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다. 주로 △한국은행의 환매조건부채권(RP)과 자금조정예금 △콜시장 △양도성예금증서(CD) △머니마켓펀드(MMF) 등 초단기 상품을 기웃거리고 있다.

시중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은 내수부진 심화, 기업 구조조정 본격화 등에 따라 투자 리스크가 갈수록 높아질 것으로 판단, 자금운용과 관련해 전례가 없는 '몸사리기 정책'에 안주하고 있다.

지난 9일 한은이 실시한 RP 매각에는 사상 최대규모인 79조6500억원의 자금이 몰려들었다. 직전 사상 최대규모였던 지난해 12월 26일의 44조5000억원에 비해 배 가량 많았다. 이날 낙찰액은 14조원. 나머지 부동자금은 콜시장이나 한은의 단기조정예금 등을 전전할 수밖에 없다.


한은은 기회 있을 때마다 RP를 매입해 은행, 증권사들에 자금을 돌려주고 있다. 하지만 한은에서 풀려난 자금은 회사채 등 크레디트물(신용물)이 아닌 설정액 100조원이 넘는 MMF로 흘러간다. 게다가 자산운용사들은 MMF로 자금이 밀려오자 펀드에서 일정부분 현금 보유액 비중을 유지하는 액수만큼 은행에 자금을 맡기고 있다. 단기 자금의 '증폭 현상'이 더욱 심해지고 있는 것이다.

염상훈 SK증권 애널리스트는 "이런 구조를 깨려면 증권사나 은행이 한은에게 받은 자금을 위험을 감수하고 기업어음(CP)이나 회사채에 투자해 CP 금리를 내리고 다시 장기 회사채 금리도 끌어내려야 한다"며 "현재로선 CP 금리가 하락하는 추세지만 아직 회사채까지 이동하긴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폭발 방향은 증시(?)= 일각에서는 "폭발 직전에 이른 유동성이 결국 증시로 유입될 것"이란 예측이 나오고 있다.

현석원 현대경제연구원 금융경제실장은 "넘쳐난 유동성이 흘러간다면 부동산시장보다는 증시가 될 것"이라며 "이럴 경우 기업들의 자금조달에 숨통을 트여주는 효과가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하지만 유동성의 부분적인 유입으로 증시가 상승한다해도 이를 추세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이종우 HMC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풍부한 유동성이 증시를 본격 상승시키려면 경기 회복이 전제돼야 하지만 펀더멘털이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라며 "한은의 자금공급에 따라 일시적으로 신용물의 금리하락 현상이 나타나겠지만, 장기채나 주식으로 본격 유입되려면 적어도 올 3분기 이후 경기회복 조짐이 가시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해법은= '기업 구조조정의 신속한 진행을 통한 불확실성 제거'라는 데 이견이 없다.

권순우 실장은 "지난해 불거진 금융 리스크 대신 실물 부문의 리스크가 시장을 짓누르고 있다"며 "무엇보다 시장에서 펀더멘털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장인환 KTB자산운용 대표는 "기업의 구조조정이 선행된 뒤에야 증시로 자금이 돌아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에 비해 정부의 시장안정대책과 기업 구조조정 추진은 시장 기대에 크게 못미친다. 채안펀드의 자금 중 90% 가량이 낮잠을 자고 있고, 그나마 집행된 자금은 회사채 등 신용물이 아니라 단기유동성 상품에 집중됐다. 정부에서 부동자금 확대에 나선 꼴이다. 자본확충펀드도 금융당국과 한은의 이견조율이 지연되며 출범이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 추진도 당초 예상과 달리 "퇴출보다는 생존" 쪽에 초점이 맞춰지며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 당국은 외환위기 때와 달리 '자율회생 우선, 후 구조조정'에 따라 진행할 수밖에 없다고 해명하지만, 시장에서는 보다 신속한 추진을 요구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해법은 단순하지만 그 추진이 쉽지 않아 문제"라며 "하지만 정부 당국에서도 구조조정에 따른 책임론 등을 의식해 선제적이고 과감한 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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