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의 여의도 편지]'변양호 신드롬'

머니투데이 박재범 기자 2008.11.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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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소제기 2006년 12월 7일, 변론종결 2008년 11월 10일, 1심 선고 2008년 11월 24일. 꼬박 2년 걸렸다.

공판은 86차례 진행됐다. 마라톤 재판이었다. 출석한 증인만 34명에 달했다. 여기엔 프랑스,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 날아온 증인도 적잖았다.



과정은 치열했다. 검찰과 변호인은 부딪쳤다. 증인과도 팽팽히 맞섰다. 전문성에 기댄 공방도 오갔다.

[제비의 여의도 편지]'변양호 신드롬'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 등은 기초 상식 수준이었다. 경영학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다양한 가격 추산 모델의 이름들이 기본으로 나왔다. 조흥은행 매각, 서울은행 매각, LG카드 사태 등 2000년대 초기 금융시장을 흔들었던 사건까지 망라됐다.



언뜻 보면 재판정이라기보다 금융 세미나장 같기도 했다. 외환은행 헐값매각 사건 재판 얘기다. 항소심 등이 예정돼 있긴 하지만 말 많았던 기나긴 재판은 일단 끝났다. 재판부의 선고문은 1019페이지. 읽는 데만 1시간 30분이 걸렸다. 하지만 2년에 비하면 그리 긴 시간도 아니었다.

# 결론은 '무죄'였다. '예상대로'였다. '정책적 판단'이 사법적 잣대로 재단될 수 없다는 점도 재확인됐다.

이걸 확인하는데 2년을 썼다. 투입된 비용도 상당하다. 심적 고통, 사업 차질 등 개인적으로 잃은 것만도 수두룩하다. 외환은행은 외환은행대로 많은 것을 잃었다.


투기 자본, 매국노, 국익적 결단 등 소모적 공방도 고스란히 사회적 비용이 됐다. 국제사회에서 치른 비용도 만만찮다.

하지만 이런 것들도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에 비하면 별 거 아니다. '변양호 신드롬'은 '소신 있게 일해 봐야 나만 손해'라는 학습효과가 낳은 공직 사회의 복지부동을 일컫는 말.

이 앞에선 "일을 하다 실수해 접시를 깨뜨린 경우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일을 하지 않아서 접시에 먼지가 쌓이게 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접시론'도 힘을 잃는다.

오죽하면 변양호가 최후 진술에서 스스로 '변양호 신드롬'을 밝혔을까. "훌륭한 신하가 치욕을 당하는 것은 나라가 치욕을 당하는 것이니 '변양호 신드롬'으로 후배들이 움츠러들지 않고 떳떳이 일할 수 있도록 재판부가 잘 판단해 달라"고 말이다.

# '변양호 신드롬'이 '복지부동'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건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지점에서 여당 정책통 의원들의 푸념이 떠오른다.

그들은 "답답하다"고 했다. 상대는 행정부다. 엄밀히 말해 공무원들이다. '말을 안 듣는', '코드가 안 맞는' 차원은 아니다.

이보다 안타까움에 가깝다. 프리 워크아웃제도, BIS 비율 기준 완화 등을 외쳐도 공무원들은 감감 무소식이다.

선제적 대응을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고 싶어도 머리와 발이 돼야 할 사람들이 좀체 움직이지 않는다.

한 의원은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움직이는 법을 잊은 듯 하다"고 토로했다. "예전엔 제도를 바꿔야 한다며 이곳저곳 쑤시고 다녔는데…"라고도 했다.

자발과 창의가 사라졌다는 얘기다. 부실 징후가 있는 은행에 선제적 조치를 한 게 자발과 창의가 아닌 범죄로 인식된 탓이다.

한 관료는 "대한민국을 이끈 기업가 정신도 사라졌고 관료의 열정도 이제 없다"며 "이를 되살려야 희망이 있다"고 걱정했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인다. "'시중 금리를 내려라' 'BIS 비율 기준을 완화해라' 등 대통령의 지시도 나중에 수사 대상이 될 수 있지 않겠냐"는 비아냥이 실재한다.

경제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해서라도 '변양호 신드롬'을 푸는 게 먼저다. 이것부터 '창의적'으로 고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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