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유령'에 시달리는 한국이 위기인 이유

머니투데이 홍찬선 MTN 경제증권부장(부국장) 2008.10.29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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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칼럼]눈에 보이는 위기현상과 보이지 않는 진짜 위기

'위기유령'에 시달리는 한국이 위기인 이유


나이가 든 탓인가 보다. 요즘 주위에서 위기라고 야단법석을 떨어도 위기감이 들지 않는다.

11년 전, 외환위기가 본격화되던 1997년 1월에 느꼈던 긴장감이 그다지 없다. 그해 1월 한보철강이 부도난 뒤, 진로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들이 잇따라 부도를 내고 쓰러져 대마불사(大馬不死)론이 무너질 때. 하루하루가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팽팽한 긴장감이 가시지 않았다.

환율 주가 등 가격변수만으로 볼 때는 이미 위기



지금도 가격변수로만 보면 이미 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다. 우리 경제의 대외경쟁력을 나타내는 원/달러 환율은 달러당 1467.8원까지 올랐다. 외환위기 이후 10년7개월만에 최고로 올랐다(원화가치 폭락). 문제는 더 상승할 것이라는 불안감이 가시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종합적 경제체력을 보여주는 코스피는 27일 장중에 900선마저 무너져(892.16) 사상 최고치(2085.45, 2007년 11월1일 장중기준)보다 무려 57%나 폭락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는지, 연기금을 비롯한 기관들이 이틀 동안 1조원 가량 순매수에 나서며 999.16까지 회복했지만 국내외 여건을 볼 때 추가상승에는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분석이 다수다.



위기론에 밀려 한은이 전격적으로 기준금리를 연5%에서 4.25%로 0.75%포인트나 내리는 파격을 보였지만 시장 반응은 썰렁했다. 국고채 유통수익률이 0.32%포인트 떨어졌지만 기준금리 인하 폭에는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3개월짜리 기업어음(CP) 금리는 7.21%로 움직이지 않았고 양도성정기예금(CD) 금리도 6.04%로 0.14%포인트 떨어지는데 그쳤다.

어처구니없는 외국의 루머성 한국 위기보도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내외 언론에서는 ‘한국 위기론’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느니, ‘아이슬란드 다음은 한국’이라느니, ‘한국 위기의 중심에는 리만(이명박-강만수) 브라더스가 있다’는 등등…. 국내에서 루머로 떠도는 말이 애널리스트 등의 입을 빌려 해외 언론에 실리면, 그것이 다시 부메랑으로 돌아와 한국의 주식과 원화 값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어처구니없게 되풀이되고 있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겪은 지 11년만인 2008년 10월, 다시 ‘위기라는 유령’에 시달리고 있는 이유는 수없이 많지만,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하나는 3개월짜리 외화자금을 빌려 1년 이상 장기로 운용한데서 비롯된 은행 자산의 만기불일치(Mis Matching)에 따른 외화유동성 부족이고, 다른 하나는 부동산 과열로 비롯된 개인 및 건설회사에 대한 과중한 부동산담보대출의 부실화 우려에 따른 원화 유동성 경색이다. 가장 중요한 셋째는 국내외 위기상황에 시의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해 시장의 믿음을 잃고 있는 정부의 ‘신뢰 상실’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3가지 요인 외에 더 심각한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고 나면 부풀려지는 위기론이 옳은지, 아니면 나의 나이 탓인지를 놓고 곰곰이 따져보니 지금 눈에 보이는 위기론의 원인과 위기 현상 뒤에는 잘 보이지 않는 정말 무서운 놈이 도사리고 있다는 데 화들짝 놀랐다.

그것은 바로 한국인과 한국기업이 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잃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다할 부존자원 없는 소수민족이, 오로지 풍부하고 질 좋은 인재를 기반으로, 세계 11대 경제대국(지금은 13대로 밀렸지만)으로 오른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자신감이었는데, 그것이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성장동력이었던 희망과 자신감 상실이 진짜 위기

한국경제의 그동안 성장기반이 수출이었고, 수출시장은 미국과 중국 그리고 유럽이었는데,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함께 위기상황에 빠지면서 앞으로 수출이 엄청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불안과, 글로벌 금융위기가 소비 위축으로 연결되면서 내수도 급속히 얼어붙고 있다는 공포가, 가뜩이나 얻기 어려운 일자리가 더욱 줄어들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날에 대한 희망이 가위눌리고 있다.

정부의 위기대책은 바로 이렇게 사그라드는 희망과 자신감을 되살릴 수 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지만, 최근에 내놓는 대책은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 주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목표물을 정확히 가격하는 스마트 폭탄처럼 위기의 원인을 정확히 가려내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을 제시해야 하고, 비용에 비해 효과가 적은 융단폭격처럼 여전히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식의 처방으로 풍부하지 않은 정책 수단과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지난 19일 발표한 ‘국제금융시장 불안극복방안’은 긍정적이다. 은행의 외화유동성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외화차입에 대해 외화차입 규모(800억 달러)보다 훨씬 많은1000억 달러까지 정부가 지급 보증함으로써 불안감을 가시겠다는 의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27일 있었던 한은의 전격적인 0.75%포인트 금리인하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금리를 낮춤으로써 한계기업과 개인들의 금리부담을 줄여줘 금융경색을 해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겠지만, 돈이 돌지 않는 상황에서 금리인하는 의도한 금융경색해소에 그다지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한은은 은행채를 RP거래 대상에 포함시킴으로써 은행의 자금경색을 풀어줄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고, 총액대출한도를 2조5000억원 늘리는 등 이번 위기의 3대 원인 중 하나인 자금경색을 해소하기 위한 대책도 포함했지만, 시장에서 필요할 만큼의 유동성 공급방안은 제시하지 못했다.

극복되지 못하는 위기는 없다..미래의 꿈을 제시해야

환율급등, 주가폭락, 기업의 흑자도산 우려 등 발등의 불을 꺼야 하는데, 미래의 성장잠재력과 일자리 창출 같은 희망을 얘기하는 게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밝은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지금 불 끄는 것이 아무리 시급하다고 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불만 끄다가 불끈 뒤에 그만 기력이 없어 쓰러져 버리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불도 끄면서 앞날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에 위기 대책의 복합성이 있는 것이다.
경제 전문가로서 CEO 대통령을 캐치 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이 진정한 리더십을 발휘해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잊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훼손되지 않고 우리의 앞날을 밝혀줄 기반을 마련할 수 있을지가 앞으로 1개월에 달려 있다.

극복되지 않는 위기는 없다. 현재 ‘위기상황’은 외환위기 때보다 어려운 점(글로벌 경기침체와 가계 부실화 등)도 있고 쉬운 점(상대적으로 적은 기업 부실 등)도 있다. 눈앞에 보이는 위기현상에만 우왕좌왕하지 말고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위기 대응 방안(컨틴전시 플랜)을 만들어 실행함으로써 국민들이 꿈을 갖고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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