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피의 일요일… 무너진 신화들

뉴욕=김준형 특파원 2008.09.1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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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뉴욕리포트]

일요일인 14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의 리먼 브러더스 본사 건물의 많은 사무실에는 여느 밤처럼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하지만 이날의 불빛은 몇시간 뒤에 열릴 아시아시장을 준비하는게 아니라 리먼의 '마지막 밤'을 준비하는 불빛이었다.
15일 새벽 0시로 넘어가는 순간, 리먼 브러더스는 파산을 신청했다. 리먼 건물의 불들도 하나 둘 꺼졌고, 158년 역사도 사라졌다.
월가, 피의 일요일… 무너진 신화들


월가의 시선이 온통 리먼에 쏠려있는 사이 또 하나의 골리앗 메릴린치는 뱅크 오브아메리카로 합병됐다. 94년 역사상 이름만으로도 통했던 세계 최강의 메릴린치였다.
2001년 9월11일. 알 카에다의 공격으로 세계 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사라졌듯, 월가를 주름잡던 두 개의 골리앗 투자은행(Investment Bank)이 같은날 무너진 것이다.

앞서간 베어스턴스와 함께 월가의 빅5 투자은행으로 꼽히던 금융회사들중 세 곳이 간판을 내렸다. '빅5중' 남은 건 골드만삭스와 모건스탠리 두개이다. 월가 투자은행의 신화 역시 종언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어스턴스와 메릴린치를 인수한 J.P모간과 뱅크 오브 아메리카는 모두 상업은행(Commercial Bank)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실 같은 '뱅커'이지만, 인베스트먼트 뱅커들은 커머셜 뱅커들을 우습게 안다.
파이낸스 프로젝트나 대출 등 '돈장사'를 통해 수익을 내는 커머셜 뱅커들은 차림도 정장이 기본이지만 인베스트먼트 뱅커들은 넥타이도 잘 매지 않고 청바지 차림도 예사다.

전투적으로 시장을 앞서가고 후발주자나 규제가 따라잡기 전에 치고 빠지는 이들의 눈에 상업은행은 느려터진 거북이들이다.
1인당 벌어들이는 실적도 그렇고, 그 대가로 받는 연봉도 하늘과 땅차이이다.



베어스턴스가 무너졌을때만해도 어쩌다 나타난 '실수'였을 것이라는 분위기가 강했다. 베어스턴스 직원들은 합병된 뒤에도 커머셜뱅크의 전통을 가진 J.P모간을 우습게 봤다. "인스트먼트 뱅커는 어디 가든 살아날수 있다"는 자존심으로 무릎을 꿇지 않았다.

하지만 리먼도 메릴도 무너지면서 인베스트먼트 뱅커의 자존심도 함께 깔리고 말았다.

투자은행 신화의 붕괴는 다른 말로는 '증권화(Securitization) 신화'의 붕괴라고도 할수 있다. 투자은행의 비즈니스 구조는 매우 복잡하지만 결국은 '여신 후 판매(Originate-to-Distribute)'로 요약된다.


여신후 보유(Originate and Hold)를 전문으로 하는 일반 커머셜뱅크는 자신들의 장부에 자산가치가 고스란히 반영되기 때무에 위험관리를 신중하게 할수 밖에 없다.
반면 자산을 증권으로 만들어 시장에 유통시키는 투자은행 모델은 유통만 가능하다면 될뿐 채무자의 신용은 2차 고려사항이다.
이처럼 '시장은 넓고, 팔 것은 많다'는 식의 투자은행 모델이 낳은 거품과 '도덕적 해이'가 '피의 일요일'로 이어진 것이다.

무너진 것은 또 있다. '대마불사' 신화이다.
지난 4월 베어스턴스까지만 해도 미 정부당국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지
금 베어스턴스를 지원하지 않으면 리먼도 메릴도 잃게 된다"는 '대마 불사'논리로 J.P모간의 베어스턴스 인수를 지원했지만, 5개월만에 실제로 리먼과 메릴이 무너지는 걸 정부도 막을수 없었다.

앞다퉈 '글로벌 IB'를 표방하고 나섰던 한국의 금융권도 IB=황금알'의 달콤한 신화에서 한발짝 물러서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월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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