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온 서울대 교수들의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은 1960년 3월 15일에 치러진 부정 선거였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자유당은 자신들의 장기 집권을 위해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투표를 조작했다.
4월 19일 서울과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제주 등 전국에서 독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이승만 정부의 경찰은 자신들이 보호해야 할 시민에게 발포하기도 했다. 하루 동안의 시위에서만 100여명이 넘는 시민이 희생돼 이날은 '피의 화요일'이라고도 불린다.
1950년 연설하는 이승만 대통령. /사진=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이 자신을 지켜줄 것으로 판단했지만, 미국 정부는 주미 한국 대사에게 항의 각서를 보냈다. 믿었던 미국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자,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당 총재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히며 민심을 달래고자 했다.
하지만 4월 25일 서울대 교수들이 거리로 나와 이승만 정부를 압박했다. 이들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고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했다. 이를 본 시민이 호응하면서 200여명의 교수뿐이었던 행렬은 삽시간에 1만명에 가까운 인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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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이승만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계엄군 탱크 위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피의 화요일'이었던 4월 19일에서 일주일이 지난 4월 26일은 '승리의 화요일'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장관들까지 나서서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고, 전방위 압박을 받던 이승만 대통령은 결국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7일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하며 공식적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다. 자유당의 독재 체제를 만들려다가 모든 것을 잃은 그는 미국으로 망명, 하와이에서 생활하다가 1965년 7월 9일 눈을 감았다. 이승만 세력의 2인자였던 이기붕은 장남 이강석 손에 의해 일가족이 모두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 박사가 지난해 9월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 유영봉안소를 참배하고 있다. /2023.9.1. /사진=뉴스1, 공동취재단
이인수 박사는 "이 자리를 통해 4·19 혁명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며 "오늘 제 참배와 사과에 대해 항상 국민을 사랑했던 아버님께서도 '참 잘하였노라'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자기 행동에 대해 "국민 모두의 통합과 화해를 도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