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의 기억… '대통령'이나 '장관'이 될 수 없는 자들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 2018.11.26 0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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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네시아 그리고 화교 ①] 끔찍했던 1998년 5월 강간 학살 사건… 화교, 스스로 숨죽여 살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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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타 시내 전경 /사진=위키커먼스자카르타 시내 전경 /사진=위키커먼스


1998년의 기억… '대통령'이나 '장관'이 될 수 없는 자들
"우리 멋진 여성들이 되자." 인도네시아인 친구와 나는, 만나서 놀 때면 늘 '멋진 여성'이 되자며 서로에게 약속한다.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많은 돈을 벌자'거나 '좋은 영향력을 주는 인물이 되자'는 내용의 약속인데, 이를 지키기 위해 가끔씩 서로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공유한다. 나는 해외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그가, 언젠가 '멋진 여성'이 되어 인도네시아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 굳게 믿고 있다.

얼마 전, 그가 모처럼 한국에 놀러왔다. 친구와 삼겹살을 먹으며 '멋진 여성' 관련 대화를 나누던 중, 내가 농담을 던졌다. "너 대통령 할래, 장관 할래?"… 평소 하던 대로였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 차이니즈 인도네시안이잖아. (인도네시아 화인, 화교는 중국 국적을 유지한 이들을 가리키고 화인은 국적을 거주지로 바꾼 중국인들을 가리킨다.) 난 장관이나 대통령 못 돼."



이웃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 사례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민족 문제가 민감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싱가포르판 '김치 논쟁'?… "치킨라이스는 내거야"[이재은의 그 나라, 싱가포르 그리고 치킨라이스 ①] 참고) 인도네시아에서도 그렇다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화인임을 한껏 드러내며 중국식 성(姓)을 유지하는 다른 나라 화인들과 달리(Li, Lim 등), 그간 만났던 인도네시아인들은 이름 마저 인도네시아 성을 갖고 있었기에 더욱 의심하지 못했다.

"인도네시아에서 화인들 수가 적으니까, 소수민족이니까 정치인으로 당선되기 힘들다는 뜻이냐" "말레이시아처럼 화인들에게 제도적인 차별이 있냐" 묻는 내게 친구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라며 입을 열었다. 제도적 차별은 없지만 화인들 스스로 자중해야하는 분위기라고. 그 뒤 친구 입에서 나온 이야기들은 충격적이었다.



"1998년 5월, 가족들과 숨어 산 적이 있어. 10살쯤 됐을 땐데… 폭도들이 화인들만 보면 강간하고 죽였던 일이 있었어." '인도네시아 화인 학살'이나 '인도네시아 화교 강간살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화인들에게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98년 5월, IMF 외환위기 당시 군부 독재자 수하르토 전 대통령에 대한 퇴진 촉구 항의가 벌어졌을 때의 일이다. 인도네시아 토착민들은 중국 이민자 부호들이 수하르토와의 관계에서 이익을 얻었다며 반발했다. 흥분한 폭도들은 화교들을 살해하고 화교 여성들을 강간했으며, 화교 가게를 불태웠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화교 1200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기억은 끔찍했다. 중국계로 보이는 사람은 모두 학살당했다. 친구 가족도 친척들 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 기사에게 큰 돈을 주고 얼굴을 숨긴 채 이동했다. 그는 그의 고모도 학살의 피해자라고 입을 열었다. "고모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폭도들이 들이닥쳤어. 갑자기 남자 수십명이 쳐들어와서는 고모를 보고 달려든거야. 한 명씩 돌려가며 고모를 강간하고, 심지어 쇠 꼬챙이 같은 도구로 성 고문하고…"


당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우리 교민들도 간접적 피해를 입어 기억하고 있다. 한국 대사관은 교민들에게 외출을 삼가라고 당부했고, 교민들 스스로도 소지품에 태극기를 다는 등 자신이 중국인이 아님을 드러내며 몸을 지켰다. 이 같은 일이 발생한 뒤 일부 능력이 있는 화교들은 다른 나라로 이주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대로 삶의 공간인 인도네시아에 남았다. 대규모 강간 학살 사건 이후 인도네시아를 떠난 사람은 많이 잡아도 전체의 3.7%에 불과했다. 이렇게 남은 화인들은 스스로 자세를 낮춰 살게 됐다. 그 날의 끔찍한 기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인도네시아 화인들이 이 같은 학살 사건을 처음 겪은 건 아니었다. 이미 1965년에도 비슷한 기억을 겪었었다. 1965년 9월30일, 이른바 '9.30 사건'이다.

수하르토 전 대통령(당시 수하르토 장관)은 1965년 공산주의 쿠데타를 진압한 후 6명의 육군장성을 체포해 살해했다. 또 수하르토 장관을 필두로 군부는 인니공산당이 주도한 공산주의 쿠데타를 강력 진화했다. 자연히 이들과 연관이 있다고 의심되던 수카르노 전 대통령은 실각했다. 수카르노 전 대통령은 비동맹 제3세계의 주요멤버 중 하나로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를 내세웠으며 미국과 대립하여 UN을 탈퇴하는 등 서방진영과 각을 세운 사람이었다. 권력의 핵심으로 올른 수하르토는이후 32년간 집권(1966~1998년)하게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30만명에 이르는 화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됐다는 것이다. 수하르토를 필두로한 인도네시아는 쿠데타의 배후 세력으로 중국을 강력히 의심했다. 이에 따라 인도네시아에 위치한 중국 기관들은 수색을 당했고, 화교들은 대대적으로 탄압됐다.

중국은 관련이 없다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의 우파 군부는 나날이 불안해져갔다. "중국이 '9.30' 사건에 관여해 쿠데타를 지원했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했고, 군중을 조직해 중국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국민들에게 반중국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인니군경의 반공·반화 활동은 날이 갈수록 격렬해졌고 연이어 대사관을 습격했다. 군부의 선동이 더 잘 통했던 이유는, 이미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 화교들에 대한 반감이 자리해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화교의 인구비율은 전체 인구의 3%에 불과하지만 인도네시아 경제력의 70~80%를 장악하고 있다. 역으로 이야기를 하면 97%의 현지인은 국가전체의 경제력 가운데 고작 20~30%만을 소유하고 있다는 셈이다. 1965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같은 점 때문에 인도네시아 토착인들은 반감이 컸다. 더군다나 이들의 부가 자신들을 착취해 얻어낸 결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350여년간 이어진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기 기간 네덜란드 식민 정부는 화인을 토착민을 관리하는 '관리자'로 고용해 큰 부를 안겨줬다. 즉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 초에 현재의 자카르타인 바타비아(Batavia) 지방에 정착해서 동인도회사라는 주식회사의 형태로 식민지를 개척했는데, 돈벌이에 능했던 중국인들을 이용한다면 식민지 경영이 용이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동인도회사는 화인들을 중간인으로 하는 징세 도급제를 실시했다. 국가에 고정된 액수를 미리 지급하고 획득한 특정의 서비스를 행하거나 이윤추구 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말한다. 이를 통해서 화인들은 식민정부에 일정한 돈을 내고 각종 활동을 했고, 현지인들로부터 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반대로 현지인들에게 화인들은 중간 착취자의 존재로 자리 잡게 됐다. 식민지기 이전부터 상업활동을 통해서 큰 부를 축적한 화인들은, 네덜란드 식민지배기에는 정 부와의 공생관계를 통해 강력한 경제적 지위를 구축함으로써 비중국계 주민들의 부러움과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1965년 인도네시아 토착민들로부터 분노의 타겟이 된 화인들은 대량으로 학살됐다. 화교에 대한 약탈, 방화, 살육이 만연했다. 화교단체와 화교학교는 연달아 문을 닫았다.

이 사건으로 화교들은 인도네시아에 제대로 뿌리를 내려야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중국 국적을 버리고 인도네시아 국적을 얻었다. 화교에서 화인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국적 뿐만 아니라 이름도 개명했다. 수하르토 집권 후 신질서(Orde Baru)시기 '정부령 1966년 12월 제127호'에 의해 중국 성씨를 인도네시아어식으로 바꿀 것을 요구됐다. 화인들은 중국계임을 숨기고 살고자, 이때 대대적으로 이름을 개명했다. 이어 부를 자랑하거나, 정치적으로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도 자중하자는 여론이 생겼다.

친구가 대통령이나 장관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건, 그러니까 제도적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대신 화인들의 정체성, 혹은 끓어 오르기 직전의 뒤엉킨 민족 문제, 긴 역사와 문화적 배경의 문제다. 내가 인도네시아의 민족 갈등과 1998년의 강간 학살 사건을 더욱 주의깊게 바라본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다음 편에서는 그 이유를 다각적으로 살펴본다.

참고문헌
인도네시아 화교사회 형성과 반화교폭동에 대한 연구, 중국인문학회, 홍재현
식민형 ‘중간시민’에서 동화형 ‘유사시민’으로, 신명직
동남아 화인디아스포라의 현지사회 정착과 화인정책, 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김혜련
화교에서 화인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박경태
인도네시아의 화교와 화교 자본, 지역연구, 신윤환

☞[이재은의 그 나라, 인도네시아 그리고 화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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