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강해도, 약해도 별로"… 적당해서 EU 중심국 된 나라

머니투데이 브뤼셀(벨기에)=이재은 기자 2018.11.05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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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의 그 나라, 벨기에 그리고 EU ①] 강대국간 이해 조정·힘의 균형 맞추는 역할 가능… 韓, 동북아의 벨기에 될까

편집자주 세계화 시대,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각 나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이나 국제뉴스를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등을 국제정치와 각 나라의 역사, 문화 등을 통해 재미있게 풀어나갑니다. 매주 월요일 연재됩니다.

벨기에 브뤼셀 전경. 중간에 그랑플라스가 보인다. /사진=이재은 기자벨기에 브뤼셀 전경. 중간에 그랑플라스가 보인다. /사진=이재은 기자


"너무 강해도, 약해도 별로"… 적당해서 EU 중심국 된 나라
운 좋게 '유럽연합(EU) 기자상'이란 상을 받게 돼 벨기에에 열흘 정도 머물게 됐다. 그런데 왜 하필 벨기에냐 하면, 수도 브뤼셀에 EU본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주변인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벨기에에서 뭘 그리 오래있느냐" "벨기에에선 뭘 즐길 수 있냐" "벨기에는 공식 일정 동안만 있고 주말에는 네덜란드나 프랑스를 가라" 등으로 말이다.



벨기에는 이처럼 우리에게 조금은 생소한 국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경상남북도 크기 영토에 인구 1000만명 정도의 소국이다. 그렇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4만불을 넘을 정도로 경제 강국이고, 교역량도 세계 10위권 내외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다.

세계적으로도 벨기에는 소프트파워(정보과학·문화·예술 등이 행사하는 연성권력) 강국으로 잘 알려져있다. 그리고 사실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생활 곳곳에도 벨기에가 스며들어있다. 한국인들 사이 인기 많은 소설·애니메이션 '플란다스의 개' 배경은 벨기에 플랑드르 지방의 호보켄 마을이다. 한국을 비롯 전세계에 팬이 많은 ‘틴틴의 대모험’(벨기에 작가 에르제가 연재한 만화. 50개 언어로 60개국에서 판매되며 만화계의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이나 ‘스머프’(벨기에 작가 ‘피에르 쿨리포드’가 완성한 애니메이션)도 벨기에산이다. 벨기에 곳곳에는 스머프나 틴틴 벽화가 그려져있고, 이로 된 관광 상품도 즐비하다.



우리가 좋아하는 배우 오드리 햅번이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 소설 파랑새를 쓴 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도 벨기에 사람이다. 패션이나 디자인 부문에서도 벨기에는 뛰어난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앤트워프 왕립예술학교가 그 선두에서 유명 인사들을 배출해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황재근 디자이너가 졸업한 곳으로 잘 알려져있다.
벨기에 시청사에서 판매하는 스머프 에코백 기념품. 벨기에 대표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스머프가 아토미움(1958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기념관)을 손에 들고 있다. /사진=이재은 기자벨기에 시청사에서 판매하는 스머프 에코백 기념품. 벨기에 대표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스머프가 아토미움(1958년 벨기에에서 열린 국제박람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기념관)을 손에 들고 있다. /사진=이재은 기자
그 뿐인가, 우리는 벨기에 음식도 즐겨 먹는다. 와플반트, 베러댄와플 등 다양한 벨기에 와플 프랜차이즈는 한국에서 인기이고, 고디바·노이하우스·마콜리니·길리안 등 벨기에 초콜릿이나 레페·스텔라아르투아·호가든 등 벨기에 맥주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벨기에의 진짜 저력은 다른 데에 있다.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는 세계 기구 및 유럽의 주요 기구가 모두 위치해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본부, 유럽연합군 최고사령부(SHAPE), EU 본부, 유럽 의회, 유럽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EU의 행정부) 등이 모두 브뤼셀에 위치한다.

단순히 기구들만 위치한 건 아니다. 벨기에는 EU 대통령이라 불리는 EU 정상회의 초대 상임의장도 배출해냈다. 바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꺾은 헤르만 반 롬푀이 벨기에 전 총리다. 분명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등 걸출한 유럽 대국들에 힘이 밀리고, 심지어는 베네룩스 3국이라고 함께 묶여 불리는 이웃 국가 네덜란드에 비해서도 국력이 약하다는 평을 받기도하는 국가인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지난달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EU 정상회담을 위해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했다. 왼쪽부터 문 대통령,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도널드 터스크 유럽연합 상임의장 /AFPBBNews=뉴스1지난달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EU 정상회담을 위해 벨기에 브뤼셀을 방문했다. 왼쪽부터 문 대통령,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도널드 터스크 유럽연합 상임의장 /AFPBBNews=뉴스1
이는 벨기에가 ‘적당한’ 파워(즉 상대적 소국)와 지명도, 매력있는 소프트파워를 갖춘 국가로서 이 같은 점들을 장점으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벨기에는 영국·독일·프랑스·오스트리아라는 전통적 강대국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이 나라들은 세계적 슈퍼파워(강대국)다. 자연스레 고난도 많았다. 나폴레옹 전쟁, 1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때는 열강들의 싸움터가 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와 나치 독일에 점령되기도 했다.


원치 않게 다른 나라와 통합된 적도 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주변 강대국들은 프랑스를 견제하고 세력균형을 꾀하기 위해 프랑스 바로 옆에 적당한 규모의 국가가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벨기에는 원치 않았지만, 강대국들의 논리에 따라 비엔나 회의(1814~1815년)에서 이 같은 내용이 확정됐다.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와 가톨릭 국가 벨기에는 여러모로 다른 특징을 가진 국가였기에 이 구상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네덜란드는 각종 네덜란드 우선 정책을 써서 벨기에인들을 분노케 했다. 예컨대 네덜란드어만 공용어로 사용하도록 하는 법이 제정되는 등의 방식이었다. 당시 벨기에에서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등이 사용됐고, 브뤼셀의 상류계층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사용했는데 이런 배경을 무시한 결정이었다. 이 같은 불만이 누적된 벨기에는 결국 1830년 '벨기에 혁명'을 일으켜 독립을 쟁취해냈다. 이처럼 벨기에는 약소국의 설움을 아는 국가다.
벨기에는 유럽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다. /사진=구글맵벨기에는 유럽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다. /사진=구글맵
하지만 언젠가부터 벨기에의 이 같은 '약소국의 설움'은 오히려 벨기에의 장점이 됐다. 벨기에가 변화의 선두에 섰던 점도 유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유럽은 당시 부흥하던 미국과 소련에 밀려 국제 무대에서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연히 유럽에서는 평화와 경제적 부흥을 원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벨기에는 이 같은 흐름을 읽고 평화로의 변화에 앞장섰다.

벨기에는 1951년 4월18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결성하는 파리조약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와 함께 3국간 관세동맹을 통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로써 ECSC는 프랑스·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룩셈부르크·벨기에 등 6개 나라가 참여하는 동맹이 됐다. 이 ECSC가 1957년 유럽원자력공동체를 설립하는 내용의 로마조약을 통해 유럽경제공동체(EEC)로 발전했고, 이어 1993년 11월 마스트리히트 조약을 통해 유럽연합(EU)으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현재 EU는 28개 회원국이 참여한 공동체다.

이 과정 벨기에는 핵심 EU 국가 6개국(ECSC를 함께 창설한 6개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적당하다'는 점 덕분에 본부를 갖게됐다. 1952년 7월23일 프랑스 파리에서 6개국 외무장관이 모여 어디에 본부를 설치할지를 논의했는데, 이들 모두 입을 모아 브뤼셀에 본부를 설치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다른 굵직한 국가들 중 하나가 본부를 갖게되면 그 국가가 갖는 힘이 너무 커져 힘의 균형에 실패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는데, 그렇다고 벨기에가 (룩셈부르크처럼) 너무 작지도 않아 더욱 적당하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점 때문에 벨기에 브뤼셀은 ECSC 창설과 함께 본부를 가져갔다.
벨기에 정치가 겸 경제학자 젤란트(Paul van Zeeland)/사진=위키커먼스 벨기에 정치가 겸 경제학자 젤란트(Paul van Zeeland)/사진=위키커먼스
(사실 이 과정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벨기에 정부는 브뤼셀에 본부가 설립되는 데 반대했다. 그 이유는 브뤼셀 보다는 당시 벨기에의 철강 및 석탄 산업의 핵심 지역 리에주(Liege)에 본부가 설치되길 바랐기 때문이다. 제란트 당시 벨기에 외무장관은 1952년 파리에서의 논의 당시 "절대로 브뤼셀에는 본부가 설치될 수 없다. 나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강력히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결국 브뤼셀에 본부가 설치됐다. 1952년 파리에서 '본부 위치 결정' 이야기가 잘 진행되지 않았고, 1957년 3월 로마 조약 체결 당시에도 결정이 나지 않자 1958년 1월1일, '임시 해결책'으로 6개 국가가 돌아가면서 본부를 맡기로 했기 때문이다. 벨기에(België·Belgique)는 'B'로 시작하는 국가였기에 가장 먼저 본부를 맡게 됐다. 하지만 이후 'D'의 독일(Deutschland)로 옮겨갈 때는 이 이야기가 지지부진하게 진행됐고, 이 다음 'F'로 시작하는 프랑스 차례가 됐을 땐 모든 국가가 '유럽의 가장 큰 도시' 파리에 본부가 세워지길 원치 않았다.

결국 벨기에는 브뤼셀에 지속적으로 본부를 유지하게 될 것임을 직감하고, 이전에 사무실만 임대했던 것에서 벗어나 브뤼셀 베를레몽 수녀원(Berlaymont)에 본부를 크게 만들기로 결정했다. 수녀원에는 큰 정원이 있어 공간이 충분했고, 이미 많은 수의 건물이 있어 적합했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베를레몽 빌딩'은 현재까지 EU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여기에 EU의 주요 기관인 유럽 위원회의 본부가 입주해있다.)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베를레몽 빌딩. 유럽연합(EU)의 주요 기관인 유럽 위원회의 본부가 입주한 건축물이다./사진=위키커먼스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베를레몽 빌딩. 유럽연합(EU)의 주요 기관인 유럽 위원회의 본부가 입주한 건축물이다./사진=위키커먼스
이렇게 본부가 생기면서 중요 도시로 자리매김한 브뤼셀은 자석처럼 다른 주요 기관들도 끌어당겼다. 1997년 EU의 알짜배기인 유럽집행위원회도 벨기에에 생겼다. EU의 입법기구인 유럽의회 건물 중 다수도 브뤼셀에 위치한다.(본부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다.)

벨기에는 '적당한 규모의 소국'으로서 EU에서 줄곧 강대국 간 이해 조정 역할을 맡아왔다. 비토권을 적절히 활용해 일종의 EU 대주주인 강대국들과 ‘소액주주'인 나머지 20여개 회원국들의 이해관계를 막후에서 조정해왔다는 평가다. (벨기에인으로서 연임에 성공해 5년 간 EU 정상회의를 이끌었던 헤르만 반 롬푀이 전 상임의장은 벨기에의 이 같은 국가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이로 여겨진다. 그는 임기 초기 '약한 나라의 총리여서 세력 균형을 위해 뽑혔다'며 조롱 받았지만, 이후에는 '조용한 리더십'을 보여줬다며 호평 받았다. 특히 유럽 재정위기 때 독일·프랑스 등 강대국들과 20여개 회원국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이면서 연임에 성공했다.)
헤르만 반 롬푀이 전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사진=뉴시스헤르만 반 롬푀이 전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사진=뉴시스
벨기에는 또 탁월한 위치(대부분의 EU 회원국에서 오고가기 편리한 교통의 요지)와 이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민족과 언어(프랑스어·네덜란드어·독일어가 모두 공용어), 다양한 문화·강력한 소프트파워를 가진 나라로 누구도 브뤼셀이 EU의 수도인 것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도록 만들었다.

벨기에의 약소국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이를 승화해 장점으로 삼은 점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인구, 상대적으로 약한 경제력, 상대적으로 약한 국력 때문에 힘든 역사를 가져왔다. 지금까지 남북한이 둘로 쪼개져있는 것도 이 같은 핍박의 역사 중 일부다. 하지만 한반도의 뛰어난 지정학적 위치와 ‘상대적으로’ 약한 국력, 뛰어난 소프트파워를 전략적으로 활용한다면 오히려 한국이 가진 요소들은 장점으로 기능할 수 있다. 과거 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와 화합을 원했던 유럽인들의 바람을 벨기에가 선두에서 추진했듯, 한국 역시 동북아의 평화와 번영에 앞장설 수 있다.

우리 외교 안보 전문가들이나 정책가들도 이 같은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한국은 2013년 9월 '중견국 외교' 가능성을 주목하며 멕시코, 인도네시아, 터키, 호주와 함께 국가협의체 '믹타'(MIKTA)를 출범시켰다. 즉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전통적인 강대국들이 자국우선주의, 탈세계화행보를 보이면서 글로벌 이슈에 대한 리더십이 약화되고 있는 반면 한국을 포함한 중견국이 글로벌 현안에 대해 리더십을 발휘할 여지가 커지는 상황에 주목한 것이다. 벨기에가 세계적 흐름을 읽고 3국 관세동맹을 통해 ECSC에 앞장 선 것과 겹쳐보인다. 마침 한국의 소프트파워는 벨기에를 비롯 다른 국가에 뒤지지 않는다. K-POP, K-Drama 등 한류 파워를 가진 국가가 우리나라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벨기에 브뤼셀 유러피언빌딩에서 열린 제12차 아셈정상회의 전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벨기에 브뤼셀 유러피언빌딩에서 열린 제12차 아셈정상회의 전체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달 17~18일 ASEM(아시아유럽회의) 정상회의겸 브뤼셀을 찾아 앞으로 동북아 역시 EU같은 화합을 이뤄 번영을 이룰 것을, 또 이 점을 위해 '중견국' 한국이 노력할 것임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나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도 통합과 화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라며 "한반도에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구도를 해체하는 과정은 유럽에서와 같은 평화와 번영의 질서를 만드는 과정"이라 말했다. 한국 정부의 의지는 어딘가 기대감을 갖게한다. 이 평화의 시류에 앞장선 중견국 한국이, 언젠가는 주도적으로 국제 여론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 말이다.

☞ [이재은의 그 나라, 벨기에 그리고 EU ②]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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