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사이트] '분노'와 '광기'의 정치학

머니투데이 이상배 기자 | 2016.07.04 05:26

[the300] 분노가 공포를 압도한 '브렉시트' 투표…집단 광기에 기댄 지도자 막을 수 있는 건 유권자 뿐

# 1997년 봄, 이석형 서울대 총학생회장이 불법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됐다. 수백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이씨의 석방을 요구하며 관악캠퍼스 정문에서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진압에 나섰고 물리적 충돌 과정에서 신입생 한명이 경찰의 발에 차여 코뼈가 부러진 채 의식을 잃었다. 신입생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졌다는 소식은 무선호출기(삐삐)를 타고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평소 학생운동에 관심이 없던 학생들조차 분노에 휩싸여 시위 현장으로 뛰쳐나갔다. 시위대의 규모는 순식간에 2배로 불어났고 시위는 더욱 격화됐다.

'분노'는 대중을 정치의 현장으로 끌어내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인간의 감정 가운데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공포'조차도 집단적 분노 앞에선 힘을 잃는다. 이성 따윈 말할 것도 없다.

최근 전세계 금융시장을 기습 강타한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가 그런 사례다. 잔류파들은 영국이 EU(유럽연합)을 떠날 경우 닥칠 경기침체를 경고하며 '공포 마케팅'을 펼쳤지만 대중은 끝내 탈퇴파의 손을 들어줬다. 일자리를 잠식하고 치안을 위협하는 이민자들에 대한 분노, 혜택도 없이 천문학적인 분담금만 뜯어가는 EU에 대한 분노, 영국을 배제한 채 EU를 주무르는 독일에 대한 분노가 EU 탈퇴 후 미래에 대한 공포까지 압도했다.

이런 분노에 불을 지핀 게 '로더럼 집단성폭행 사건'이다. 잉글랜드 북부 로더럼이란 도시에서 파키스탄 무슬림 이민자들이 1997년부터 2013년까지 영국 백인 소녀들을 무려 1400명이나 성폭행한 사실이 2014년 밝혀졌다. 파키스탄 이민자들이 범행을 위해 조직적인 네트워크까지 형성하고 있었다는 데 영국은 충격에 빠졌다. 나이젤 페라지의 극우 영국독립당(UKIP)은 이 사건을 EU 탈퇴 운동에 활용했고 결국 성공했다.

분노가 정치를 지배하는 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4·13 총선에서 호남이 국민의당에 몰표를 던진 것도 '친노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안철수 의원이 좋아서가 아니라 호남을 괄시했던 더불어민주당 친노세력에 본때를 보여주려는 의도였다는 게 중론이다. 국회를 '3당 체제'로 재편하겠다거나 대선을 앞두고 안철수 의원에게 힘을 실어주겠다는 등의 전략적 판단은 뒷전이었다. 한 호남 유권자는 "우리도 국민의당이 호남에서 이렇게 싹쓸이할 줄은 몰랐다"고 했다.


분노는 우리 정치사를 이끌어온 핵심 동력이었다. 신군부의 호헌 조치에 대한 분노가 대통령 직선제 부활을 가져왔고, 외환위기를 불러온 YS정권의 무능에 대한 분노가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은 노무현정부 출범의 배경이 됐고,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 따른 촛불시위는 이명박정부의 국정운영 방식을 바꿔놨다.

이쯤 되면 정치인으로선 대중의 분노를 집권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싶다는 유혹이 들만하다. 문제는 지도자의 가치관이 왜곡돼 있을 경우다. 이성이란 제어장치를 거세한 분노의 정치는 때론 끔찍한 비극을 낳는다. 극단적인 사례가 아돌프 히틀러다. 유태인 이민자들이 나라를 더럽힌다며 인종주의적 집단 광기를 자극한 히틀러의 나치는 끝내 유태인 등 500만명을 학살하고 2차 세계대전을 통해 60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결과를 남겼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지도자가 대중의 분노와 집단적 광기를 이용해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 할 때 이를 막을 수 있는 건 유권자 뿐이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인종주의적, 국수주의적 광기에 기댄 도널드 트럼프를 백악관에 들여보낼 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미국 유권자의 몫이다.

한 외신 칼럼니스트는 "지금 미국과 영국은 누가 빨리 망할 지를 놓고 서로 치열하게 경쟁 중"이라며 "아직까진 브렉시트를 택한 영국이 앞서 있지만, 미국에겐 아직 트럼프가 남아있다"고 했다. 11월 미국에서 광기가 이성을 압도한다면 그 피해는 비단 미국만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분노는 일종의 짧은 광증이다. 분노를 이기는 것은 최대의 적을 극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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