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들 옷 벗으면 많이 벌텐데 뭘"

머니투데이 심재현 법조팀장(차장) 2024.08.20 0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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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삽화=김현정 /삽화=김현정


"로펌 변호사 급여의 3분의 1만 받고 누가 판사를 하려고 하겠습니까."

아무도 대꾸하지 못했다. 젊은 법조인들 사이에서 판사가 더이상 지망 1순위가 아니라는 얘기에 나온 현직 판사의 씁쓸한 토로였다. 그를 탓할 건 못 됐다. 20년 넘게 사명감으로 법정을 지켜온 성품을 알기에 그 말이 더없이 현실적이라는 걸 모두가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재경지법 한 부장판사와의 식사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법관의 보수 문제는 법조계 누구라도 선뜻 꺼내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돈 문제라는 게 그렇다. 더구나 유구한 전통의 유교 국가에서 손꼽히는 엘리트 집단이 '호구지책'을 직접 거론하는 건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법조계를 잠시라도 들여다본 이라면 누구나 법관의 보수 얘기가 오롯이 판사 개인의 배를 불리겠다는얘기가 아니라는 건 안다. 1순위에서 밀려난 법원의 지위가 재판의 질적 하락으로 이어지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재판 지연이 단적인 사례다. 어느 정치인 재판이 3년이 넘었다더라, 어떤 대기업 총수가 8년째 법정 다툼 중이라더라는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전국 법원에서 민사 단독은 1심 선고까지 평균 7.6개월, 민사합의 사건은 평균 14개월이 걸렸다. 소송을 내 대법원 판결까지 받는 데 걸리는 시간이 평균 36개월이라고 한다. 생업을 제쳐두고 법정에 매달려야 하는 보통사람들의 부담이 그만큼 늘었다는 것이다. 법관의 이탈과 인력 부족, 역량 하락이 주요 원인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법관이 돈 얘기를 꺼내는 건 여전히 눈치가 보이는 게 현실이다.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얼마 전 이런 일도 있었다. 정부 관료, 정치권 인사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법관 보수 얘기가 나오자 단박에 "옷 벗으면 많이 벌 사람들인데 뭘 걱정해주냐"는 타박이 나왔다. 다들 대체로 맞장구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적어도 나랏일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자리라면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선 안 됐다. 옷 벗으면 많이 벌 수 있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법관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 부분을 놓쳐선 안 된다.



개인의 욕망을 무시한 채 책임만 강요한 시스템이 어떤 결론에 이르는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가까운 역사에서 공산주의가 독재로 흐른 과정이 그렇다. 무슨 일이든 사명감으로만 하라고 해서 제대로 운영될 순 없다. 옷 벗길 고민하는 법관들이라고 사명감이 없을까. 허나 법복이 욕망을 덮어주진 못한다. 올초 로펌으로 자리를 옮긴 전직 판사는 "'백점 판사는 빵점 아빠'라는 말이 너무 아팠다"고 했다. 싱가포르에서 법관 보수를 로펌 파트너변호사 수준으로 높였더니 국민의 사법 신뢰도가 90% 이상으로 올라섰다는 사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꺼풀 벗겨 들여다보면 사법에 대한 투자를 주저하는 이면에는 어쩌면 "옷 벗으면 많이 벌 사람들"이라던 그날 언급대로 들키기 싫은 시샘이 숨어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사법 낙후의 피해가 결국은 국민들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배 아프다고 해서 외면하기만 하면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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