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기시다 "일본의 보물, 세계의 보물로" 자축

머니투데이 김종훈 기자 2024.07.27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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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타 현 지사에 "보존에 힘써달라" 축하 전화
군함도 때 강제징용 말바꾼 기시다
'전체 역사 전달' 한국 합의는 아직 언급 안 해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현지시간) 도쿄에서 열린 태평양 도서국 정상회의 개막식서 연설을 하고 있다./AFPBBNews=뉴스1 /사진=(도쿄 AFP=뉴스1) 우동명 기자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8일(현지시간) 도쿄에서 열린 태평양 도서국 정상회의 개막식서 연설을 하고 있다./AFPBBNews=뉴스1 /사진=(도쿄 AFP=뉴스1) 우동명 기자


일제가 조선 노동자들을 강제로 징용, 금 채굴을 시켰던 사도광산이 27일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데 대해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일본의 보물이 세계의 보물이 됐다"며 자축했다.

이날 교도통신 보도에 따르면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사도광산이 위치한 니가타현 하나즈미 히데요 지사에게 전화해 "일본의 보물이 세계의 보물이 됐다"면서 유산 보존에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또 엑스 게시글에서 "사도광산은 전통 수공업을 극한까지 끌어올려 서양 기계화에 버금가는 일본 독자 기술의 진수를 이룬 곳"이라면서 "지역 관계자, 국민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다"고 했다. 한국과 약속한 강제징용 역사 전시 등에 관한 언급은 이 게시물 전까지는 없었다.

사도광산 등재를 결정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카노 타케히로 주유네스코 일본대사는 "일본 정부는 사도광산의 전체 역사를 종합적으로 반영하는 해석과 전시 시설 등을 개발할 것"이라며 "사도광산의 모든 노동자, 특히 한국인 노동자를 진심으로 추모한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 정부는 그동안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채택된 모든 관련 결정과 이에 관한 일본의 약속들을 명심할 것"이라며 "앞으로도 한국과 긴밀한 협의 하에 해석과 전시시설 등을 계속 개선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인 약 2000명이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일본 사도광산'이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 사진=머니투데이 DB 일제강점기 조선인 약 2000명이 끌려가 강제노역에 시달린 '일본 사도광산'이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 사진=머니투데이 DB
사도광산은 니가타 현 인근 사도섬에 위치한 금 광산이다. 일본은 서양과 달리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수작업으로 높은 품질의 금을 대량 생산한 역사가 있다면서 14년 전부터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했다. 아사히 보도에 따르면 17세기 전반 사도광산 금 생산량은 전세계 생산량의 10%에 달했으며, 최고순도는 99.54%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도광산은 일제강점기 시절 약 2000명의 조선 노동자들이 강제로 끌려와 혹사당한 곳이기도 하다. 인근 박물관에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명단과 담배 배급 등에 관한 기록이 보관돼 있다.

일본은 또 다른 강제징용 장소인 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 2015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을 때 "1940년대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의지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노동을 받았다"고 했다. 과오를 인정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이때도 강제징용을 포함한 역사 전체를 알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기시다 총리는 안내문 중 'Forced to work'(노동을 강요당했음)이라는 표현은 강제노역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발언해 논란을 빚었다.

사도광산에 대한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인들이 거주했던 기숙사 시설을 사실상 폐허 상태로 방치했다. 한국이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에 반대할 수밖에 없던 이유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려면 한국을 포함한 세계유산위원회 위원국들의 만장일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이에 일본은 근현대사를 제외한 에도 시대(17~19세기)로 한정해 유산 등재를 요청했다. 세계유산으로 다룰 만한 시설과 채광 기술은 에도 시대까지였고, 그 이후는 메이지유신과 함께 서양 채굴 방식을 채택한 탓에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논리였다. 이에 대해 조선인 강제징용 문제를 피해가려고 편법을 쓴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후 일본은 한국과 물밑에서 협상 작업을 벌였고, 한국은 사도광산에 얽힌 역사를 왜곡없이 전달한다는 조건을 달아 등재에 합의하기로 했다. 외교부에 따르면 일본은 사도광산 내 설치한 추모·전시 시설에 일제강점기 국가총동원법, 국민징용령 등의 한반도 시행을 인정하는 문구를 담았다.

또 전시물에는 조선총독부의 관여 하에 강제동원 모집과 알선이 순차 시행됐고, 1944년 9월부터 '징용'이 시행돼 노동자들에게 의무 작업이 부여된 내용도 포함됐다. 작업 위반자는 수감되거나 벌금을 받았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 노동자들의 바위 뚫기, 버팀목 설치, 운반과 같이 위험한 작업을 더 많이 했다는 기록과 식량 부족, 사망 사고, 조선인 노동자들의 탈출 시도와 수감 등 기록이 전시됐다.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정부는 일부 역사를 제외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으며 반드시 전체 역사가 반영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면서 일본이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권고를 성실히 이행하고, 선제척 조치를 취할 것을 확인한 뒤에 등재 결정에 동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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