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꾼 범죄수익 추적하는 경찰에…공무원 "번호표 뽑고 기다리세요"

머니투데이 이강준 기자, 최지은 기자, 김미루 기자 2024.05.3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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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범죄수익 환수, 타이밍에 달렸다①]

편집자주 사기 범죄가 늘면서 피해 금액도 증가하고 있다. 돈을 빼돌리기 위한 범죄수익 세탁 방법은 진화하고 있지만 이를 저지하기 위한 인력과 제도는 뒤처져 있는 현실이다. 범죄수익은 반드시 토해내게 돼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사기 범죄를 줄이는 길이다. 범죄수익을 환수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수사기관의 노력과 제도 개선책을 살펴본다.

#지난달 한 시도경찰청 소속 범죄수익추적수사팀 수사관은 사기 피의자의 재산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수도권의 한 주민센터에 방문했다. 해당 센터에 피의자의 가족관계증명서 제공 공문을 보냈지만 "직접 받으러 와야한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받아서다. 담당 주민센터 직원을 만났지만 이 직원은 수사관에게 "번호표 뽑고 기다리라"고 말했다. 이 수사관은 번호표를 뽑고 대기하다 반나절을 무의미하게 보냈다.

사기 범죄자들의 범죄수익을 추적하는 경찰들이 겪는 일상이다. 경찰은 사기 피의자가 재판을 받기전 범죄수익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자산을 동결시키는 '기소전 몰수·추징 보전'을 검찰을 통해 법원에 신청할 수 있다.



경찰청 범죄수익추적수사계 개요/그래픽=이지혜경찰청 범죄수익추적수사계 개요/그래픽=이지혜


그러나 범죄수익임을 입증하는데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 같은 사건인데도 피의자의 재산 종류에 따라 매번 영장을 달리 신청해야 하고, 거래 흐름을 분석하거나 소유관계를 확인하려면 매번 시청, 구청 등을 방문해 협조를 구해야 한다. 수사관들은 범죄 수익을 찾는 일 뿐만 아니라 유관기관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는지도 고민하며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지자체)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자료 제공이 지지부진해지면 그동안 사기범은 범죄수익을 숨길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만약 가상자산쪽으로 수익을 감추기 시작하면 찾기 더 어려워진다.



범죄수익 추적, 10일내 끝내야 하는 '속도전'인데…느린 유관기관 협조에 애타는 경찰
21일 서울시내 한 금거래소의 골드바 모습. 사진은 기사와 연관 없음. 2024.4.21/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유승관 기자21일 서울시내 한 금거래소의 골드바 모습. 사진은 기사와 연관 없음. 2024.4.21/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서울=뉴스1) 유승관 기자
30일 경찰 등에 따르면 지난해 범죄수익은닉규제법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범죄수익 보전 대상범죄는 약 1만5000개까지 확대됐다. 사기범 검거뿐 아니라 피해회복에 대한 치안 서비스 수요도 늘면서 경찰청은 올해 '범죄수익추적수사계(범수계)'를 정식 출범했다.

범수계는 '속도전'인 범죄수익 추적 수사를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범죄수익 추적은 대개 피의자 체포 시점부터 시작되는데, 경찰 수사 단계에서 피의자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는 기간은 최대 10일이다. 이 기한 안에 검찰에 넘기지 않을 경우 경찰은 피의자를 석방해야 한다.

피의자들은 이 기간을 최대한 활용해 범죄수익을 세탁하려 노력한다.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고급 아파트 등 부동산을 비롯해 부동산 분양권, 자동차, 예금부터 골드바·백화점 상품권 같은 현물도 활용한다.


경찰은 피의자가 특정 자산이 범죄수익으로 거둔 점이라는 걸 △소유관계 확인 △거래 흐름 분석 등을 거쳐 입증해야 한다. 근거가 부족하면 경찰이 기소전 추징 보전을 법원에 신청해도 기각될 수 있다.

문제는 피의자 범죄수익 관련 정보가 여러 부처와 기관에 분산돼 있다는 점. 경찰은 국세청 같은 기관과 달리 피의자의 재산 보유 현황을 자유롭게 확인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매번 영장을 신청하고 발부받아 집행하거나 유관 기관에 협조를 요청해야 한다.



주민등록등본, 가족관계증명서 같이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료도 경찰은 하루 종일 지자체에 협조를 '읍소'해야한다. 은행에서 계좌내역을 제공받으려 해도 책임을 회피하고 싶은 담당자를 붙잡고 반복해서 설득해야 한다. 타 기관에 범죄수익 추적 수사 협조를 요청하는 동안 피의자는 사기 범죄로 벌어들인 재산을 빼돌릴 시간을 확보하는 셈이다.

한 시도청 경찰 관계자는 "행정안전부에 '행정정보공동이용시스템'이 구축돼 있는데, 가족관계증명서 등 자료는 세정기관과 달리 경찰은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도 해당 전산을 통해 바로 볼 수 있는 상황이라 기술적으로 다른 서류를 보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며 "당위 면에서도 기관에 공문 보내면 받을 수 있는 자료인데, 공문 없이 전산망을 이용하면 범죄 수익 추적 시간이 더욱 단축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담인력도 태부족…"영장 발부 절차, 유관기관 협조 요청 절차 등 간소화 필요"
(부산=뉴스1) 윤일지 기자 = 부산지방검찰청 강력범죄수사부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온라인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며 범죄수익 550억원을 자금세탁한 혐의(범죄수익은닉 규제법 위반, 부동산실명법 위반 등)로 9명(구속 4명·불구속 5명)을 기소했다고 22일 밝혔다. 사진은 검찰이 압수한 50억원 상당의 스포츠카 3대. 사진은 기사와 연관 없음. 2024.1.22/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부산=뉴스1) 윤일지 기자(부산=뉴스1) 윤일지 기자 = 부산지방검찰청 강력범죄수사부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온라인 도박사이트를 운영하며 범죄수익 550억원을 자금세탁한 혐의(범죄수익은닉 규제법 위반, 부동산실명법 위반 등)로 9명(구속 4명·불구속 5명)을 기소했다고 22일 밝혔다. 사진은 검찰이 압수한 50억원 상당의 스포츠카 3대. 사진은 기사와 연관 없음. 2024.1.22/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부산=뉴스1) 윤일지 기자
범죄수익추적을 위한 전담 인력 역시 부족한 상태다. 경찰청 범수계 전담 인력은 단 3명이다. 전국 시도 경찰청에 배치된 전담 인력 134명을 더해도 140명이 채 안 된다.

전문가들은 다른 기관에 협조를 구하는 절차를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피의자 한 명에 대한 사기사건이라면 영장 발부를 한 번만 받아도 모든 재산 내역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거나, 관세청 등 세정당국과 경찰청 간 직원 파견을 보내 수사 협조를 위한 '핫라인 구축'도 거론된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우리나라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없어 범죄수익이라도 제대로 환수하는 게 중요하다"며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사기 공화국'이라 할 만큼 사기 범죄가 많고 처벌 수위는 낮다. 법적 제도적 장치를 정비해 경찰에 범죄수익을 최대한 환수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고 절차를 간소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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